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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직 그 자리에 있다면

ㅡ 잃어가며 얻는 것


어떤 새벽들은
오래 놓아둔 물컵처럼
조용히 금이 가 있다.

그 틈으로 새어 나가는 것들을
한동안 붙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손안에 남아 있던 것들은
대부분 식은 물,
깊이를 잃어가는 그림자 뿐이었다.

그래서 조금씩 비우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낡은 확신,
두 번째는 오래된 약속,
세 번째는 이름을 잃어가는 기억.


비워낸 자리마다
가벼운 바람이 드나들었다.
그 바람은 잃어버렸다고 믿어온 것들을
다른 형체로 데려왔다.

때로는
새잎 하나가 돋는 망설임으로,
때로는
밤하늘 별 하나가 남긴 침묵으로.

무언가를 잃는다는 건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올 길을
조용히 내어주는 일에 가까웠다.

나는 지금도
여러 것들을 놓치며 살아가지만,
그렇게 흘러나간 자리 위로
낯선 빛 하나가 앉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알게 된다
사라진다는 말 속에도
아주 작은 탄생이 숨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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