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urekim Mar 15. 2019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딱 한걸음의 바람벽

지금 와서 대학시절을 돌아보면 피곤하고 어지러웠던 기억밖에 없다. 날이 추우면 추워서, 날이 더우면 더워서, 날이 흐리면 흐려서, 날이 좋으면 좋아서 그 나름대로 다 힘이 들었다. 외출을 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꼭 낮잠을 잤다. 밤낮으로 시간만 있으면 잠을 잤지만 피곤이 풀리지는 않았다. 이십 대 청춘의 활기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 계절만 대놓고 쉬었다면 금방 해결되었을 것 같은데, 어린 혈기는 없어도 어린 치기는 있을 때라 나름대로 뭐든 잘 해내고 싶었던 것 같다. 몸은 힘들고 모든 게 서툴 때인데 모든 것을 잘 해내고 싶었기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다. 사실은 대학생이 해야 하는 일이나,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뭐든 열심히 할 게 필요했다. 열심히 하는 것만 훈련받아왔기 때문에, 쉬어도 되는 때조차도 쉰다는 것은 다소 죄의식을 동반했다. 


나중에 가족들은 대학때의 나에 대해서 “학교가 아니라 직장을 다니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근거 없는 의무감으로 시간을 죽이는 나날이었다. 계량경제학 기말시험을 치른 날, 나는 무작정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일찍 들이닥친 추위에 덜덜 떨면서, 서울관에 도착했을 때는 진눈깨비가 날리기 시작했다. 비를 피하듯이 후다닥 전시실로 들어섰다. 평일 오후였기 때문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 흰 복도에 발자국 소리를 울리면서 전시실과 전시실 사이를 산책하듯이 걸어 다녔다.

작품을 사이를 천천히 지나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내용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별 쓸데없는 심각한 생각들이었을 것이다. 슬슬 어딘가 앉고 싶을 때쯤 영상실이 나타났다. 빈 영상실에 혼자 앉아 스크린에 맺힌 영상을 멍하니 봤다. 영상이 생각보다 길었고, 인기척도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벤치에 반쯤 기대 누웠다. 그리고 잠시 눈을 붙였다.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나는 영상실에 혼자였다. 어느 사이에 낯이 익어버린 장면들이 스크린에 흐르고 있었다. 

툭툭 털고 일어나서 전시실을 빠져나왔다. 미술관 앞마당에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그 위에 발자국을 찍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를 지치게 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혹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이따금 전시실 사이를 배회하다가 영상실에 앉아있고는 했다. 어느 날은 면접 복장을 하고 앉아있기도 했고, 어느 날은 서류가방을 놓고 앉아있기도 했다. 매일의 삶에서 딱 한 걸음 멀어지고 싶은 날, 나는 영상실에 앉아있었다. 이유 없이 지친 날에 그 한 걸음 물러날 곳이 있었기 때문에, 매번 다시 툭툭 털고 돌아갈 수가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맥도날드: 맥모닝을 먹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