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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rekim Mar 15. 2019

수토메 아포테케리: 이마를 식히는 바람의 향기

내가 이 생소한 이름의 퍼퓨머리에 처음 방문한 것은 햇빛이 몸의 땀마저 바싹 말려버리던 8월 한낮의 일이었다. 그날 오전에 나는 인천에 볼 일이 있었다.


인천에 도착했을 때에 약속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이 왔고, 나는 편의점 하나 없는 낯선 거리에서 오전부터 사정없이 쏟아지는 햇볕의 융단폭격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화가 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몹시 지치는 기분이었다. 잠시 들어가 머리를 식힐 장소조차 마땅치 않은 곳에서, 마른 흙먼지의 내음에 숨이 막혔다. 


문득 이 생소한 이름이 불쑥 떠올랐다. 옆자리에 앉은 선배의 향기를 물어 단 한번 들은 적이 있었던 이름이었다. 수토메… 아포케테리인지 아포테케리인지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번의 검색 끝에 인천에서 망원동으로 길을 잡았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또 생소한 골목길을 지도에 의지해서 걸어가야 하는 험로였다. 아침부터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날에 인천에서 또 길도 모르는 퍼퓨머리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아주 잠시 호흡했던 향기 때문이었다. 가본 적 없는 숲에서 맡은 것 같은 그 향기 속에서 숨을 좀 쉬고 싶었다. 


시장골목을 지나 놀이터를 지나 주택가를 지나 퍼퓨머리가 있다는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도대체 출입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바쁜 일상에서 평온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을 찾을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일이군,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좌절감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커다란 스테인리스 철문을 밀어보았을 때, 굳게 닫혀 있을 것만 같았던 그 문은 너무나 쉽게 열렸다. 


천장이 낮은 계단을 지나 나무 미닫이 문을 열었을 때, 도시에서 숲을 만난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아주 푸른 향기가 가득한 작고 새하얀 공간이었다. 유선형 가벽이 자그마한 공간을 부드럽게 휘감고 있었다. 똑같은 유리병들이 나무 테이블 위에 줄을 맞춰 서 있었다. 그 유리병마다 넒은 공간의 향기가 담겨 있었다. 조향사는 내가 스무 개가 넘는 향기를 아주 천천히 테스트하는 동안 가벽 저쪽의 공간에서 아주 부드러운 인기척을 내며 기다려주었다. 

아카데미아 컬렉션이라고 이름이 붙은 열 세 개의 향기를 들이마시는 사이에 몸의 열기가 천천히 식었다. ‘평화’, ‘단순함’, ‘관용’, 향기의 이름으로는 과도하다고 생각한 단어들은 정말로 내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숨결을 차분하게 했다. 유칼립투스와 라벤더, 로즈마리의 향기가 공기 중에 투명한 녹색으로 피어올랐다. 베티버의 씁쓸한 향기와 패출리의 숨막히는 가죽 냄새가 예민하게 들떠있던 마음의 무게중심을 낮춰주었다. 감각이 생각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내가 다시 철문 밖으로 나섰을 때, 아스팔트로 하얗게 쏟아지는 햇볕 사이로 미끄러지는 바람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길은 여전히 붐비고 더위는 현기증을 동반했지만 생각의 앙금을 맑게 가라앉힌 머릿속은 서늘하게 맑았다. 그 여름 내 나는 문 밖을 나서기 전에 수토메의 향기를 입었다. 그러면 나는 그 철문 밖을 나서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불어온 바람이 내 이마를 어루만지던 그 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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