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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rekim Mar 15. 2019

창경궁: 창경궁 커피숍, 가을한정

입김이 부서지는 날씨에 자판기 커피는 이상하게 좋다. 쌀쌀한 날에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건 단지 기계가 타준 믹스커피를 마시는 것과는 좀 다른 일이다. 동전이 구멍에 들어설 때부터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커다란 기계가 열심히 작동하고 난 후에, 결국 혀에 감기게 될 따스한 단맛을.


자판기 커피를 마시기 좋은 곳이 따로 있지는 않겠지만,  사람마다 마음속에 자판기 커피 명소 하나쯤 있지 않겠나 한다. 나에게는 창경궁 관리사무소 앞뜰이 그런 곳이다. 엄마는 그곳을 ‘창경궁 커피숍’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삼청동에서 나고 자랐다. 엄마에게는 종로가 고향 동네인지라 종종 사대문 안 지리에 대한 애정 어린 소개를 늘어놓고는 했다. 한낮 인사동의 분주함에 대해서, 성곽길을 산책하는 호젓함에 대해서, 해질녘 고궁의 기와에 물리는 저녁 노을에 대해서 엄마는 몇 시간이라도 말할 수가 있었다. 

종로의 골목들을 손금 보듯이 아는 엄마였지만, 종로에서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그 ‘창경궁 커피숍’이었다. 가을 한정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다른 계절에 가장 좋은 장소는 도무지 한 가지만 골라내지 못했지만 가을이라면 창경궁이었다. 창경궁에서도 옥천교도 춘당지도 아니고, 식물원도 아니고, 오로지 관리사무소 앞뜰이었다. 엄마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했는데, 가을 ‘창경궁 커피숍’에서만은 자판기 커피를 한 잔씩 뽑아 주었다. 


나는 어려서 창경궁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아마도 자판기 커피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달그락 달그락 동전 떨어지는 소리, 버튼을 꾹 눌렀을 때 툭, 하고 종이컵이 걸리는 소리와 징 하고 자판기가 우는 소리, 쪼르륵 물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손에 쥘 때 꼭 손가락에 묻는 한방울의 커피자국, 뜨겁고 매끄러운 종이컵의 감촉, 공중으로 하얗게 피어오르는 김과 그 달고 씁쓸한 그 묘한 맛까지, 어린 나에게는 창경궁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엄마와 나란히 벤치에 앉아 믹스커피를 한 잔씩 마시면서 키 큰 나무들의 잎사귀가 지는 것을 보고 나면, 그제서야 창경궁 구경을 다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와 마지막으로 했던 약속은 봄이 오거든 창경궁에 꽃구경을 가자는 것이었다. 때는 겨울이었고, 그 전 해 가을에 창경궁을 가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엄마와 봄에 창경궁을 가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봄에 창경궁을 가지 않는다. 봄이 되면 창경궁을 가자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 대신 낙엽이 다 지기 전에 커피 한 잔 하러 창경궁에 가고는 한다. 자판기 커피는 날이 추워야 맛이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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