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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rekim Mar 15. 2019

윤중로: 낮의 하늘, 밤의 풍경

봄에 벚꽃 구경을 가는 것은 사실 학창시절 내내 가지고 있던 꿈이다. 이게 어째서 ‘꿈’씩이나 되었는가 하면,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하는 시기가 꼭 중간고사를 한주 앞둔 때이기 때문이다. 매년 중간고사가 다가오면 벚꽃이 피었고, 벚꽃이 피면 중간고사가 목전이었다. 바람에 섞인 꽃내음을 맡으면서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시험범위를 외우다가 시험을 쳤다. 시험 치는 주에는 꼭 봄비가 내렸는데, 그러고 나면 어느새 꽃이 지고 잎이 돋고는 했다. 


고등학교 3학년 첫 중간고사를 앞두고도 똑같았다. 그 해는 겨울에 눈이 아주 많이 왔었는데, 그만큼 봄기운이 반가웠다.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으면 창밖에서 봄 기운이 섞인 달콤한 밤바람이 책장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수험생이기도 했지만, 학창시절의 마지막 해이기도 했다. 교복을 입고 보내는 마지막 봄이었다. 중간고사를 한 주 앞두고, 나는 연습장 귀퉁이에 썼다.


꽃 보러 가자


옆 자리에 앉아있던 친구에게 보여줬다. 친구는 ‘언제?’라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나도 똑같이 입모양으로 대답했다.


 ‘지금’.


학교에서 대방역까지는 걸어서 이십 분 거리였다. 대방역에서 여의교를 건너면 바로 윤중로였다. 책도 펼쳐 놓고 가방도 그대로 둔 채로 둘이 몸만 빠져나갔다. 

하늘은 짙은 남색으로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여의교를 걸어서 건너보았다. 여의교 아래는 놀랍게도 물이 아니라 숲이었다. 숲을 건너는 다리 너머로는 벛꽃이 연분홍색 구름처럼 띠를 그리고 있었다. 벚꽃이 피어있다기 보다는 연분홍색의 아주 커다란 솜사탕들이 줄지어 서있는 것 같았다.


길에 들어서자 머리 위로 벛꽃이 차양처럼 가로등 불빛을 가렸다. 꽃이 만개한 것이 아니었다. 늦도록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기 때문인지 절반은 아직 봉우리였는데도, 고개를 들면 연분홍색 꽃잎 틈으로 밤하늘이 잘게 찢어졌다. 왼편으로는 한때 강이었을 것 같은 숲이 펼쳐져 있었다. 새카만 나무들 저편으로 다리 건너편의 불빛, 줄지어 가는 자동차의 전조등과 미등의 붉고 노란 빛이 점점이 떠있었다. 낮의 하늘에 밤 거리를 걷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건 마치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걸어보는 것 같았고,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벚꽃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봄이라는 계절을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학교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제법 바빴다. 별 일 없을 줄 알고 자리를 비웠던 것이었고, 실제로 별 일은 없었다. 아주 짧은 외도였고, 선생님은 그저 꽃이 얼마나 피었는지 물었다. 대학을 가서도 봄 꽃 구경은 외도하듯이 했다. 회사를 다니면서는 꽃이 피는지 지는지 잊고 살았던 것 같다. 여의도를 지날 일이 생기면 윤중로를 잠깐 들리기는 했지만 시간 내서 찾아간 적은 없다. 다만 바람에 봄기운이 묻어날 때 생각한다. 꿈이 찾아오는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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