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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rekim Mar 15. 2019

뿌리서점: 책과 뿌리, 그리고 서점

책과 뿌리는 잘 어울리는 낱말이다. 이런 생각을 처음 했던 날이 뿌리서점에 처음 간 날이었던 것 같다. 그날은 꽤 쌀쌀한 초봄이었다. 외출할 만하게 날씨가 풀리자 아빠와 나는 겨우내 마음먹고 있던 일에 착수했다. 집에 책장이 만석이라 책이 바닥에 쌓여가고 있었으므로, 책장을 새로 살 계획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책장이 생긴다는 것은 또 마음 편히 책을 살 있다는 뜻이었다. 


아빠는 용산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큰 서점이라면 고속터미널의 영풍문고와 광화문의 교보문고밖에 모르던 시절이다. 아빠는 아는 길을 다닐 때는 절대 큰길로 가지 않고 골목길로 질러가는 성격이라, 아빠 뒤를 쫓아 낯선 골목들을 이리 틀고 저리 틀었더니 중고가구상이 있었다. 적당한 책장을 골라서 주문하고, 또 다시 아빠 뒤를 따라갔더니 서점이 있었다. 

오래된 책들을 파는 그 서점은 땅 밑으로 뻗어 나간 구불구불한 뿌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책으로 이루어진 동굴이 있다면 이런 생김새가 아닐까 싶었는데, 지상의 출입문 밖까지 책들이 밀려나와 있었다. 서점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도 서점 안에도 책들이 석순처럼 기둥을 이뤘다. 일부는 천장까지 닿았고, 일부는 허리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책에 가려서 공간의 크기가 큰지 작은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오래된 책 냄새가 공간에 배어 있었다.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타주시는 믹스커피를 마시면서 책들이 이루고 있는 풍경을 구경했다. 내가 압도적인 책동굴에 정신이 팔린 와중에 아빠는 이문열의 삼국지 전집과, 레마르크와 고리키와 헤세와 사르트르와 베르그송을 골랐다. 그리고 아빠가 보는 러시아 혁명사라든지, 제목이 한문으로 되어있었던 것만 기억이 나는 책들도.


그날 아빠와 나는 서른권에 가까운 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책장은 먼저 집에 도착해 있었다. 뿌리서점에서 사온 책들을 책장에 정리했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제대로 읽어본 것은 수능이 끝난 후였다. 수능이 끝난 겨울동안 나는 집에서 나가지 않고 뿌리서점에서 우리집에 온지 삼년이 된 책들을 읽었다. 그 활자들은 마음에 자양분이 되어주지는 않았지만, 스무 살 후에 내게 새롭게 오는 경험들에 입체성을 불러들였다. 활자들이 미리 이야기했던 순간들을, 나는 어떤 우연으로 혹은 어떤 필연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나는 초행길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여러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뿌리서점을 찾아가는 길은 꽤 복잡했던 것 같은데, 용산 재개발과 함께 뿌리서점을 찾아가기가 쉬워졌다. 지금의 뿌리서점에는 책으로 이루어진 종유석과 석순은 없다. 내가 처음 뵈었을 때의 사장님과 놀랍게 꼭 빼닮은 아드님께 들은 바로는, 늘어나는 책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육 만 권 가량을 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서점 입구 밖으로 밀려나와 쌓여 있는 책들은 여전하다. 뿌리서점은 여전히 책으로 만들어진 뿌리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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