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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rekim Apr 05. 2019

연희양과점: 아주 조용한 분주함

얼마 전에 연희동에 다녀왔다. 갑작스레 할 일들이 증발한 오후였다. 어딘가 놀러 가고 싶었는데, 번화한 곳에서 사람들과 섞이기에는 기운이 없었다. 하늘에는 비구름이 낮게 덮여 있었고, 젖은 흙내가 아직은 차가운 바람에 섞여 불었다. 어디든지 갈 수 있어서 오히려 어디를 갈지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버스 정류장에서 노선도를 읽었다. 다 읽고 나서는 그냥, 내 앞에 정차한 버스를 탔다. 


버스는 서울역과 충정로를 지나 아현동에 들어섰다. 내려볼까 생각이 들었지만 또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흐린 창 밖 풍경을 보면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버스는 이화여대 후문에서 연세대를 지날 때, 이화여대 후문의 자주 가던 가게들의 간판이 여전해서 또 연세대 앞의 풍경이 여전히 분주해서 반가웠다. 하지만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버스는 몇 번 정차를 거듭했다. 또다시 낯익은 정류장 풍경이었다. 양 옆으로는 아파트와 주택가 밖에 없는 풍경인데, 비스듬한 골목으로 비껴 들어가면 나타나는 자그마한 가게들이 불을 밝힌 동네가 생각났다. 정차했던 버스가 신호에 걸려 정차했을 때가 되어서야 하차 벨을 눌렀다. 젖은 바람이 몹시 불었다. 이 길은 언제나 그랬다. 긴 코트 자락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대로변에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가죽공방, 분식집, 주택과 술집이 기억처럼 좁은 골목 양 옆으로 옹기종기 늘어서 있었는데, 불 밝힌 가게가 많지 않았다. 가만히 기억나는 골목들을 천천히 걸었다. 언젠가 꼭 가보려고 했던 이층 양옥집에 자리잡은 찻집 앞에는 낮게 펜스가 쳐져 있었다. 초콜릿을 만들어내던, 잼을 졸여내던 공방들도 불이 꺼져 있었다. 오후 다섯 시였다. 조용하지만 분주했던 골목 풍경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아직 꽃 피지 않는 계절, 비구름이 하늘을 덮었는데 골목 풍경이 쓸쓸했다. 


기억 나는 골목을 한 바퀴 다 돌고 나니 다시 들어왔던 골목 초입이었다. 커다란 개를 키우던 복층 카페에도 불이 꺼져 있었다. 대신에 그 카페 아래의 반지하 공간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마지막을 봤을 때는 이자카야였는데, ‘ㅇㅎㅇㄱㅈ’이라고 적힌 키 작은 입간판이 서 있었다. 통 유리창으로 스미는 불빛이 따스해서 보고 있다가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까눌레, 마들렌, 피낭시에, 자그마하고 밀도 높은 달콤함들이 타원형 나무 탁자 위에 사이 좋게 올려져 있었다. 오븐에서 그을린 색채들이 짙은 테이블의 색과 어울렸다. 무얼 바라고 이 풍경 속으로 들어왔더라, 생각했다. 홍차에 까눌레와 피낭시에를 적시면서 주방에서 움직이는 파티시에들의 어깨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아주 조용한 분주함을 찾아서 왔던 것 같다. 한가롭게 바라볼 수 있는 타인의 하루를 보기 위해서. 따스하고 부드러운 단 맛이 목으로 넘어갔다. 그제서야 나는 연희동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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