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계절, 같은 풍경 안에 있어
그녀가 떠난 후, 나는 그녀를 ‘복제’하기 시작했다.
톰 포드 안경, 벤 데이비스 워크 자켓, 카시오 사각 시계. 리바이스 506 청바지와 아디다스 삼바 오리지널. 그리고 프란시스 커정의 아 라 로즈.
마치 정교한 코스프레라도 하듯, 나는 사진 속 그녀를 그대로 내 몸 위에 옮겨 적는다. 같은 옷과 장소, 포즈는 물론 찰나의 표정까지. 심지어 보이지 않는 향수 냄새까지 똑같이 걸치고 나서야 비로소 셔터를 누를 준비가 끝난다.
지난 3개월은 오직 이 '복제'를 위한 시간이었다. 그녀가 남긴 수백 장의 기록을 완벽히 베껴내기 위해 매일 옷과 액세서리를 수집했다. 그녀가 머물렀던 장소를 찾아가 그날의 공기와 구도를 맞추는 것이 이젠 내 유일한 일과가 되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옷을 중성적으로 입는 편이었고, 거의 대부분의 옷은 남자 사이즈로도 출시가 되고 있었다. 장소를 찾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모든 프레임 밖에는, 항상 내가 서 있었으니까.
정확히 3개월 전, 그녀가 떠났다. 영화 속 대성통곡 같은 건 없었다. 죽음 앞에서 사람은 경이로울 정도로 차가워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슬픔은 파도처럼 느릿하게, 그러나 썰물 없는 밀물처럼 꾸준히 차올랐다. 그녀가 좋아하던 노래를 들을 때, 데이트할 때 입었던 옷에서 그녀의 향수 냄새가 날 때, 내 칫솔과 나란하게 교차되어 꽂힌 그녀의 칫솔을 볼 때.
가끔 참아내지 못하는 밤이면 지우지 못한 사진을 본다. 사진 속 그녀를 마주하는 일은 도려낸 상처를 직접 만지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하지만 어떤 밤에는 그 고통이라도 빌려 쓰지 않으면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다.
같은 이유로 이 ‘복제’ 역시 너무나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고통이 없다면, 그녀를 그리워하는 내 마음마저 무뎌진다면, 나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그녀를 그리워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멈추지 못할 뿐이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 앨범 속 그녀의 마지막 페이지. 사진 속 그녀는 석양이 내리는 한강 난간에 기대어 뒤를 돌아보며 웃고 있다.
나는 그녀가 썼던 것과 똑같은 도수의 안경을 치켜 올리고, 그녀가 즐겨 입던 뻣뻣한 워크 자켓의 깃을 정리했다. 카메라의 타이머가 깜빡이는 동안 나는 그녀의 입꼬리 각도까지 세밀하게 흉내 냈다.
찰칵.
결과물을 확인하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넘겼다. 왼쪽엔 그녀, 오른쪽엔 나. 하지만 화면 속에는 기괴한 괴물이 서 있었다. 그녀의 옷을 입고, 그녀의 향수를 뿌리고, 그녀의 표정을 짓고 있지만, 결코 그녀가 될 수 없어 일그러진 사내.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복제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잃고 껍데기만 남은 나의 상실이었다는 것을. 이 사진 속에는 나도, 그녀도 없다. 그저 나의 유치한 미련만이 추악한 형태로 새겨져 있을 뿐.
거칠게 안경을 벗어 던진다. 맞지 않는 도수의 안경이 벗겨져 시야가 쾌적하다.
비로소 사진 밖의 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흐릿했던 한강의 물결이, 강바람에 일렁이는 이름 모를 풀들이, 그리고 난간 너머로 지고 있는 노을이 비정상적으로 선명하다. 사진 속 배경으로만 존재했던 것들이 살아있는 색으로 다가온다.
나는 뻣뻣한 자켓을 벗어 팔에 걸쳤다. 셔츠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은 그녀의 향수 냄새가 아닌, 비릿하고 차가운 강물 냄새를 실어 왔다. 그것은 지독하게 외로운 냄새였지만, 어쩐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사랑은 서로를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오래된 말이 떠오른다. 나는 태양을 등지고 카메라를 마주보는 대신, 난간 밖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가 바라봤을 석양이 내리는 한강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녀의 눈에 담겼을 찬란한 주황빛이 내 망막 위로도 번져 나간다. 사진 속의 그녀는 웃고 있었고, 사진 밖의 나는 울고 있었지만, 우리는 지금 같은 노을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흉내 내는 것만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었던 그녀의 계절이, 비로소 내 뺨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을 통해 안부를 건네오고 있었다.
“잘 가.”
그녀가 바라보았을 먼 수평선을 향해, 나는 처음으로 우리의 이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