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욱 Apr 20. 2022

'커피 한 잔의 여유'같이 기만적인 단어가 또 있을까

이른 아침, 오늘도 향긋한 커피를 내리는 것으로부터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고소한 향과 둥글고 부드러운 질감이 특징인 브라질 원두를 골라 그라인더에 넣는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원두가 적절한 크기로 분쇄된다. 부드럽고 고소한 커피 향이 벌써부터 번지기 시작한다. 잘 갈린 원두 위로 따뜻한 물을 조로록 흘러 보낸다. 원두와 물이 만나 매력 넘치는 향을 짜릿하게 발산하며 오늘의 커피가 완성된다.


매일 나의 아침을 깨워주는 생명수와도 같은 이 커피 한 잔. 하루를 준비하며 마시는 이 소중한 커피 한 잔과 함께라면, 그 어떤 바쁜 하루가 닥쳐오더라도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커피 한 잔의 여유'일까.


아니, 아니지. 천천히 커피를 입에 가져가생각해 보니 세상에 세상에 '커피 한 잔의 여유'같이 이리도 기만적인 단어가 또 있을 수가 없다. '커피 한 잔의 여유'가 도대체 무어란 말이냐. 나는 여태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평일이든 주말이든 커피를 마시면서 여유를 부려본 적이 없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해봐도 커피는 여유와 함께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여유와 어울리는 단어라면 그건 아마도 게으름이나 낮잠 같은 단어들이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잠을 깨기 위해서,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커피를 마시지 게으름을 피우거나 낮잠을 자기 위해서 커피를 마시지는 않는다. 커피는 아무리 짝을 이루려 해 봐도 도대체 여유로운 단어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무릇 현대인들이 아침에 마시는 커피란 과거 장수들이 치열한 전투에 나서기 전 기울이던 술잔과 같이 오늘도 이 커피 한잔으로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는 의식 같은 행위 아닌가 말이다. 업무를 시작하며 마시는 커피는 '오늘도 아주 평화로운 하루가 되겠지'같은 여유라기보다는 '이 커피 잔이 식기 전에 저 쓸모없는 회의를 반드시 마치고 돌아오겠소'같은 비장한 각오가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니냐 말이다.


애꿎은 커피만 흘겨보며 다시 한번 묻는다. 도대체 '커피 한 잔의 여유'는 무어란 말이냐. 나의 물음에 아무 답이 없는 커피를 향해 손을 뻗는다. 어쩔 수 없다. 미워도 다시 한 잔. 고소한 향이 입과 코를 가득 채우고 혀를 지나 목을 둥글게 넘어가는 그 질감이 놀랍게도 부드럽다. 이렇게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의 커피를 마실 때면, 잔뜩 모가 나있고 날카롭기만 한 내 인생도 조금은 향기나고 부드러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한 잔의 맛있는 커피가 주는 이 순간의 감동을 한 단어로 묘사해야만 한다면, 그래 그건 바로 행복이 아닐까. 그래 까짓 거 커피 한 잔에 여유가 담겨있지 않으면 어떠랴 그 한 잔에서 나름의 행복을 깨닫고 오늘 또 하루를 행복하게 살아내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오늘은 오늘대로 그리고 내일은 내일대로 매일매일 새로운 커피와 새로운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오늘 내게 허락된 이 한 잔의 행복을 충분히 만끽하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앞으로 커피를 마시며 도대체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어딨냐며 시비를 거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나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찾는 데는 실패했으나 '커피 한 잔의 행복'은 찾는 데는 충분히 성공했기 때문에. 이 고소하고 부드러운 커피와 함께 하는 오늘만큼은 모난 마음을 조금은 둥글게 써보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