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었다
나도 나이를 먹었다. 아직도 삶의 큰 틀에서는 어린 축에 속하지만, 분명 적지는 않은 나이가 되었다. 주변 친구들은 하나, 둘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되었다. 지인 중 몇몇은 두각을 나타내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다른 무엇보다 빈소를 찾고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일이 점점 더 잦아졌다.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이 이만큼 훌쩍 가까워졌구나 생각하며 이제는 나도 나이를 먹었다고 느낀다.
우리나라 민법에서는 만 19세 이상을 성인으로 본다. 담배와 술을 살 수 있으며, 선거를 해서 사람을 뽑고 선거에 나가 뽑힐 수도 있는 나이다. 만 19세를 넘긴지도 10년이 더 지났다. 이 정도라면 물리적인 시간의 기준으로는 아마도 충분한 어른이 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어른인 걸까?
어른보다 꼰대가 많은 세상
우리는 보통 나이가 많은 사람을 어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을 어른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꼰대로 부르는 일이 더 자주 있는 것 같다. 나이만 많은 꼰대는 특유의 권위의식으로 무장하고 젊은 세대를 억압한다. '요즘 것들은 말이야~'라는 말버릇과 함께 꼰대질 혹은 고나리질(관리질를 고의적으로 틀리게 써서 비아냥대는 말)을 함으로써 우리를 옥죈다. 아마 장래희망 칸 옆에 비 장래희망 칸이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 세대의 비 장래희망 1위는 꼰대가 차지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생각을 하다 보니 3700년 전 수메르 점토판에도 '요새 젊은것들은~'이라는 말이 적혀있다고 했다.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꼰대는 언제나 있어왔다. 꼰대를 욕하던 청년은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또 다른 꼰대가 된 건가? 그렇다면, 나이가 들면 나도 모른 채 나 조차도 자동으로 꼰대가 되는 건가?
나는 어떻게 늙을 것인가
'요즘 신입들 너무 개념 없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꼰나무(꼰대+꿈나무)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생각 없이 살다가는 꼰대의 길로 자연스럽게 접어들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사람 되기는 어려워도 괴물은 되지 말자던 그 외침처럼 대단한 사람은 되지 못해도 최소한 꼰대는 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어떻게 꼰대가 되지 않고 늙어갈 것인가. 꼰대가 되지 않는 n가지 방법과 같은 글을 읽는다고 꼰대가 되지 않을 리는 만무했다. 이런 고민이 이어지던 중 전우용 선생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지식과 경륜이 늘고 인격이 높아질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무식이 늘고, 절제하지 않으면 탐욕이 늘며, 성찰하지 않으면 파렴치만 늡니다. 나이는 그냥 먹지만, 인간은 저절로 나아지지 않습니다.
- 전우용 (역사학자)
그래, 나이는 그냥 먹지만, 인간은 저절로 나아지지 않는다. 꼰대는 가만히 앉아서도 되지만 어른은 가만히 앉아서 될 수 없다. 하루하루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병아리 주제에 내 멋대로 '이것이야 말로 꼰대가 아닌 어른의 길이다! '라고 속 시원하게 길을 제시할 깜냥은 아직 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하고 성찰하는 한 꼰대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최소한 그래도 얘기는 통하는 꼰대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함께 고민할 줄 아는 어른다운 어른
우연한 기회에 어떤 어른의 만났다. 이름 석자만 대면 알만할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다. 그 정도 위치가 되면 거들먹 거려도 이상하지 않은데, 자만에 가까운 자신감이 넘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대신 그 어른은 모두가 어이없다고 생각하는 의견까지도 끝까지 경청했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본인이 옳다고 우기며 세상의 진리를 깨친 듯 답을 강요하기보다 모르는 것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하며 함께 고민하자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분명히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하고 성찰하는 사람이었다. 아, 이런 사람을 어른이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그래, 꼰대처럼 세상은 이렇다 저렇다고 재단하고 답을 강요할 필요 없다. '아들 같아서, 딸 같아서 그래'라며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도 없다. 답 안 나오는 세상에서 각자의 스타일로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해주면 그만이다.
가장 위대한 여행자는 지구를 열 바퀴 도는 사람이 아니라
단 한 차례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여행자다
- 간디
지금까지 내게 여행은 새로운 곳으로 모험을 떠나는 것이었다. 전혀 무지했던 나는 겨우 이제야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여행을 시작했다. 느지막이 시작한 이 여행이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을지, 또 이 여행의 끝에 내가 꼰대가 되지 않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여행은 언제나 내게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새로운 관점을 가르쳐줬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 여행에서도 조금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기를, 또 꼰대가 아닌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