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뜨거운 동포애
나는 은행원이다. 은행원의 본질이 앉아서 들어온 돈을 세는 데 있는 것으로 알고 계신 분들이 있는데, 은행원의 본질은 실은 영업이다. 이런 오해는 일부 은행원들도 처음 입행할 때 흔히 하는 것으로, 신입행원들 중 많은 수가 초기에 영업 현장에서 당황한다. 생각했던 게 이게 아닌데 하면서. 물론 그중 또 많은 수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훌륭한 은행원이 된다. 나름 재미와 보람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사원 대신 행원, 입사 대신 입행이라고 한다.
내가 있는 하노이지점의 영업이라 함은 하노이 주변 공단으로 뻔질나게 다니면서 기업을 방문하고, 자금의 수요를 확인하고, 대출 제안을 하고, 필요한 금융서비스가 없으신지 확인하고, 하는 그런 과정이다. 또 기존에 거래를 하고 있는 기업도 수시로 방문해서 인사를 드리고, 감사를 표하고, '저 여기 있어요~'라고 알려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회생활이 그렇듯 그 과정에서 상대의 호감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처음 만난 사이가 대부분인 그 상황에서 머릿속에 든 모든 것을 끄집어내 펼쳐놓고, 서로 조금이라도 공통된 화제를 찾아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유사한 말로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중 한 명이고, 상대도 그중 한 명이다. 그 각양각색에서 서로 통하는 한 가지를 찾는 것. 이것이 핵심이지 않을까 싶다. 100% 통하진 않더라도 무던하게 공통주제로 삼을 수 있는 것들이 대화 소재로 인기가 많다. 골프가 그 대표적인 예다. 골프를 좋아하지도, 잘 치지도 못 하는 나 같은 사람도 악착같이 골프를 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날은 그런 영업의 일환으로 팀장과 함께 박닌 꿰보 공단에 가 있었다. 거래 기업을 방문해서 안부를 여쭙고, 차를 한 잔 하고, 그간 못 뵈었던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고, 감사의 의미로 약소한 선물도 드리고, 그냥 못 보낸다고 쥐어주신 회사 기념품을 즐겁게 받아 들고 나왔다.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쭉 펼 요량으로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어라? 타고 왔던 차가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하니 차가 바깥 도로에 있다고 한다. 가 보니 보닛이 열려 있고 기사는 울상이다.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하노이 시내가 아니고 공단이다 보니 기사가 아는 정비소도 없고 난감하다. 그때 반대편에 위치한 기업의 담장에서 반가운 한국말이 들렸다.
"차에 뭐 문제가 생겼나 보네요."
"아 예. 시동이 안 걸리네요. 안녕하세요." 일단 다가가서 명함을 건네며 인사를 드렸다. 인사만 잘해도 밥은 굶지 않는다는 신념 아닌 신념이 있다.
"저는 여기 법인장이에요. 고치는 동안 잠시 들어와 계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 법인장님 사무실에 가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얼마 후 나와보니 차는 고쳐질 기미가 없고, 기사는 전화로 하노이 복귀를 위한 대체 차편을 마련하고 있었다. 계속 마음이 쓰이셨던지 법인장님께서 다시 나오셔서 뜻밖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다.
"제 차 타고 같이 하노이 가시죠."
아,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동포애인가? 건네시는 도움을 넙죽 받잡고 우리는 차에 올랐다. 고장 난 우리 차는 그날 결국 견인차에 실려 하노이로 돌아왔다. 차를 얻어 타고 오는 길에 범상치 않은 외모와 풍채, 어디서 들어 본 듯한 '김영기'라는 성함의 궁금증이 풀렸다. 법인장님은 바로 하자동(하노이 자전거 동호회)을 이끌고 계시는 동호회 회장님이셨다. 역시 자연을 벗 삼아 라이딩을 즐기시는 분은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충만한가 보다.
회장님의 자전거 타는 모습이 하노이한인회가 매월 발간하는 '한인소식'에 하자동 소개와 함께 실린 적이 있었다. 나도 얼마 전 기행문을 한 편 실은 적이 있어서 유심히 보던 차에 알게 되었다. 속으로 '한인소식이 이렇게 인연을 맺어주니 그 잡지만 매달 열심히 읽어도 좋은 분들을 많이 알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내가 속한 KB금융그룹의 한 계열사 부사장님과는 동기 간이라고 하신다. 나도 그분을 아니까 이 세상이 얼마나 좁은가. 착하게 살아야 한다.
코로나로 인해 경기가 어려워만 가는 중에도 이렇게 한국사람들은 오순도순 동호회 모임도 하고, 난감한 상황에 처한 나 같은 사람을 선뜻 도와주기도 한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도 어려운 동포들이 조금 더 안전하게 격리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한인회를 중심으로 성금과 물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지금 베트남은 코로나를 이기고 다시 부활의 기지개를 켜려 한다. 하노이 한인사회도 그런 순풍에 실려 다시 두둥실 떠오르길 기대한다. 다시 한번 김영기 회장님께서 베풀어주신 호의에 감사드리며, 하자동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