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노이(Hà Nội, 하내 河內)에서 2186일을 살았다. 며칠 전 한국행 편도 비행기에 올랐을 때 2186일 전 하노이행 편도 비행기에서 내렸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마주친 낯선 환경과 어려운 과업에 대한 두려움을 아직 기억한다. 그날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나는 362년 전 배가 난파되어 제주도 해안에 상륙했던 '헨드릭 하멜'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그때 일을 '하멜 표류기'에 담는다. 그렇게 나의 '하내 표류기'도 시작됐다.
하노이를 떠나기 전 사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한국 가면 뭐가 제일 생각날 것 같아요?" 생활 속에서 즐겼던 쌀국수, 분짜, 열대과일 같은 베트남 음식들과 주말에 즐기던 골프나 연휴 때 가던 여행지가 그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대답했다. "사람들이요." 그렇다. 지금 한국에 와 있는 나는 하노이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제일 많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함께 했던 일들이 또 생각난다.
하노이에는 한국 사람들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하노이 한인회'가 있다. 나는 최근까지 한인회 이사로 소속되어 있었다. 은행 지점을 운영하는 주재원으로서 교민사회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왔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교민사회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나도 어려운 교민을 돕는 데 성금도 내고, 힘들게 치러진 재외국민투표에 수송차량도 제공하는 등 작은 힘을 보탰다. 힘은 작았지만 보람 있는 일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라고 생각되었다.
하노이 교민들은 2018년 12월, 박항서 감독님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가 미딩 운동장에서 치러졌을 때 태극기와 금성홍기를 나눠주는 행사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박항서 감독님의 인기가 절정일 때여서 양국 국기를 나눠 주면 베트남 사람들이 '깜언 한꾸옥, 깜언 박항쎄오'(고마워요 한국, 고마워요 박항서}로 화답하며 반기는 분위기였다. 나도 윤상호 회장님을 위시로 한 한인회 관계자 분들과 함께 국기를 나눠 줬다. 머리에는 '베트남 챔피언'이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한마음으로 응원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교민들이 모이는 행사의 진행도 두 번 맡았다. 처음은 '하노이 한인 청소년 문학상 시상식'에서였는데, 내가 속해 있던 교육문화분과 위원장님께서 사정이 생겨서 대신 사회를 볼 수 있었다. 한인 청소년들의 훌륭한 작품에 감탄하며 진행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두 번 째는 '한인회 송년회'에서였는데 여러 교민들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영광스럽고 보람 있었다. 한인회가 내게 준 참 좋은 선물이라 여기고 있다.
하노이 사는 동안 내 아내도 보람 있는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한인 청소년들을 위해 마련한 '부모와 함께하는 하노이 역사탐방' 프로그램의 인솔 선생님으로 선발된 것이다. 우리 집 박미조 선생님은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이신데 본인의 적성에 딱 맞는 봉사를 하게 되어 무척 기뻐했다. 본인만의 코스를 만들기 위해 사전에 외국인이 인솔하는 다른 프로그램에 '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참여했었는데, 사명감을 가지고 꼼꼼히 준비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아내도 그 일을 꽤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
주재하는 6년 동안 하노이 한인회를 통해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인연(因緣)이라고 여기고 싶다. 귀국을 며칠 앞두고 아내와 내가 미뤄왔던 일을 마무리지었다. 바로 애들이 어릴 때 읽던 책들을 한인회 도서실에 기증하는 일이었다. 직접 수레에 책 두 박스를 싣고, 평소 나도 자주 이용하던 한인회 도서실에 가져다 드렸다. 그렇게 돌아가는 길에 건물 1층에서 윤상호 회장님과 우연히 마주쳤다. 감사인사를 하시며 회장님은 인증샷을 찍어 나에게 '인연'이라는 문구와 함께 보내주셨다.
그런 하노이의 좋은 인연은 여기 한국에서도 이어진다. 지금 나는 서울의 A호텔에서 14일 격리를 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던 중 나는 영문 모를 간식을 배달받았다. 어리둥절하던 차에 전화가 왔다. "저는 A호텔 명동 지점의 지배인인데 권 지점장님과 하노이에 같이 계셨던 박성식 지배인을 평소에 잘 압니다. 권 지점장님이 A호텔에 격리 중이니 간식을 좀 넣어 달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고맙고 감동적일 수가 없다. 정말 맘이 따뜻해지는 바로 하노이의 인연이다.
무인도에 표류한 듯 막막했던 하노이가 나에게 이렇게 꿈에도 잊히지 않을 추억으로 남은 것은, 인연을 만들고 인연을 엮어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 속에서 일도 성공하고 보람도 얻었다. 다 같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결과라 생각한다. 귀국 전 며칠은 꽤나 바쁜 일정으로 나의 귀국을 아쉬워해 주시고, 한국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주시는 분들과 함께 했다.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그분들께 감사드린다. 또한, 하노이에 계신 모든 분들의 건강과 행복과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리고 어디서든 또 뵙기를 기대한다. 나의 하내 표류기는 해피앤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