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 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 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휴가. 앞에 여러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 즐거운 여름 휴가, 꿈같은 휴가, 쉼표 같은 휴가, 럭셔리한 휴가, 눈치 보이는 휴가, 해외로 떠나는 휴가. 뒤에 여러 술어를 붙일 수도 있다. 직장의 허락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회사에 휴가를 낸다. 자기 입장이 중요한 사람은 주어진 휴가를 쓴다. 자신이 가장 소중한 사람은 휴가를 계획하고 만끽한다. 나도 휴가를 써봤는데, 만끽하지도 못하고, 아니 낸 것만도 못했다. 기분이 더럽다.
회사에서 복지로 제공하는 제주도 휴양 시설을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취소했다. 코로나19도 변이 바이러스니 뭐니 다시 기승이고, 가족들도 다른 일이 더 바쁜 듯 하고, 마침 회사에서 취소 기회를 열어주길래 바로 취소했다. 비행기도 렌트카도 다 취소했다. 무거웠던 마음이 휴가가 끝나면 뭐 나아질게 있으랴 생각도 했지만, 소나기는 일단 피하라는 말처럼 나를 가까운 처마밑으로 인도하려고 휴가를 썼다.
혼자 캠핑을 가봤다. 7년 동안 안쓰던 장비들이라 상태가 어떤지 알지도 못했지만 충동적으로 싸이트 예약하고 떠났다. 뙤약볕 아래에서 한 두시간 텐트치고 땀흘리고 나니 머리 속이 비워지는 듯했다. 파란 하늘도 한번 쳐다 보고, 기타도 쳐보고, 맥주도 시원하게 한잔 해보고, 영화도 한편 보고, 빗소리 들으며 잠도 청하고, 아침에 산책도 하고, 할 건 대충 다 해봤다. 역시 기분은 그대로였다.
이 땅이 끝나는 곳에서 뭉게구름이 되어 저 푸른 하늘을 벗삼아 훨훨 날아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혼자 동해로 갔다. 애들 어릴 때 속초에 있는 회사 연수원에 묵으며 놀았던 기억도 나고, 군대 간 동생 부대가 근처여서 면회갔던 기억도 났다. 동해바다도 있고, 낙산사도 있고, 등대도 있고, 항구도 있었다. 혼자 앉아서 보고, 듣고, 멍때렸다. 2박3일 정도를 떠돌려 했으나 아들이 전화가 와서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서 연락을 해봤다고 하길래 1박2일로 접었다.
Moon, Red and Green light show. Green light를 보며 Gatsby를 떠올렸다. 그냥 끌리는 일이나 하고 살았으면 어땠을까?
둘째 날 아침, 산책겸 속초 시내로 걸어가서 며칠 동안 먹고 싶었던 김밥을 사먹었다. 천국에서 먹으니 천상의 맛이었는데 여기까지 와서 거기를 가다니... 회사 일로도 몇 번 갔었던 영랑호도 돌아봤다. 조용하고 적당했다. 호수 주변에 별장들이 있었는데 산불로 소실되어 철거 중이었다. 저런 곳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바로 무슨 돈으로 라는 생각을 했다. 역시 기분은 그대로였다.
영랑호는 아름다워 살고 싶은 곳이다. 주변에 없는 것도 없다. 저기서 글을 쓰면 어디 등단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는 길에 김유정문학촌에 들렀다. 항상 그의 해학과 고발이 좋았다. 그의 러브스토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두 명의 여인에게서 거절을 당하고, 한 오년 정도 글을 쓰고, 브나로드 운동을 하다가 29세에 요절했다. 그 광기의 시절에는 누구나 문인이 될 수 있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의 고향 춘천에 차려진 기념관을 아주 찬찬히 둘러봤다. 막국수까지 한 그릇 하고 나니 개중 기분이 꽤 좋아진 시간이었다.
김유정 소설 '동백꽃'의 한 장면을 재연한 곳. 저런 설정 사진 너무 좋아한다. 비로소 살짝 웃고 있다.
김유정 소설 '봄,봄'의 한 장면을 재연한 곳. 저런 설정 사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 마스크로 안 보이지만 살짝 웃고 있다.
바로 가까이 있는 소양강 댐에도 잠깐 들렀다. 그렇게 이름도 모르는 처녀를 노래노래 불렀지만 와 본 것은 처음이다. 한바퀴 걸어서 둘러봐도 좋을 듯 하지만 일모도원日暮途遠 하여 그냥 왔다. 속초 마른 오징어 한 꾸러미와 상업미 물씬 풍기는 춘천 감자빵 한 박스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가끔씩 이런 풍광이라도 마주하면 우울함이 좀 날아갈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벽걸이형 에어컨도 재설치하고, 둘째 아들 토익 시험장에도 데려다 주고, 아내가 수업듣는 곳으로 픽업도 가고, 요리도 한번씩 해서 점심도 떼우고, 건강검진 결과도 괜찮다고 받고, 밥솥 뚜껑 고장난 것도 고치고, 그러고 나니 휴가가 다 갔다.
아들 점심 먹였다.
이런 뻔한 생각들을 다시 해 봤다. 나는 일을 피하거나, 요령피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내 능력이 닿지 않는 일도 있다.또가끔 재수가 없을 때도 있지 않은가?그냥 나이 들어서 기분이 좀 쉽게 더러워지는 것 뿐이다. 나이살이나 먹어서 기분이 어떻네 저떻네 하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고, 우스운 꼴을 안당하려면 성공하고 부자되고 해야 하는데 세상이 뭐 그리 쉽던가. 어디 생면부지의 전문가를 만나 이런 저런 얘기나 좀 나눠볼까 생각도 했었는데 그건 그냥 다음으로 미뤘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고, 아마 난 무엇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냥 덤덤하게 살려고 한다. 울지 말고 아프지 말자. 휴가를 쓰고, 이렇게 이어서 시말서*도 쓴다.
*시말서 : 비로소 시始, 끝 말末 글 서書, 잘못의 처음부터 끝까지, 즉 자초지종 自初至終을 낱낱이 아뢰어 용서를 비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