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어디? 하와이?"
아내는 수화기 너머로 그렇게 되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베트남으로 발령이 났다고 했으니. '하노이'라는 낯선 말이 장동건이 너나 가라던, 정작 우리는 가본 적도 없는 '하와이'로 들렸나 보다. 인사발령이 떴다는 동료의 말에 나 역시 장난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상황은 장난이 아니었고 발령사항은 '베트남 하노이사무소 소장'이었다.
그 옛날 아버지가 군복무 중 가실 뻔 했으나 할머니께서 극구 말리셔서 못 갔다던, 바로 그 베트남으로의 갑작스런 주재원 발령은 우리 가족에게 여러 가지 숙제를 던졌다. '함께 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 '간다면 뭘 가져가고, 뭘 버릴 것인가', '그러면 살던 집을 어찌할 것인가' 등의 고민이었다.
그런 숙제들을 단기간에 괴발개발 풀어 놓고, 나는 이삿짐과 함께 하노이로 먼저 출발했다. 남은 세 식구는 한 달을 더 버틴 후 둘째의 초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합류했다.
씬짜오 (Xin chào) 안녕하세요.
노이바이 국제공항 신청사가 문을 열고 며칠 뒤인 2015년 1월 21일 나는 하노이에 도착했다. 처음 마주친 사람은 초록색 제복을 입은 공안요원이었다. 새로 지은 공항과 배치되게 뭔가 전근대적인 분위기를 풍겼으나, 나를 쳐다보던 그의 눈빛만은 날카로웠던 기억이 난다. 딱딱한 표정의 입국심사요원이 여권을 한참 뒤적거리는 통에 애써 태연해 보이려 했으나 꽤 긴장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노이사무소는 사무소장과 현지 직원, 이렇게 둘이 근무했다. 현지 직원의 이름은 짱(Trang)인데 처음 건 낸 인사는 '씬짜오' 였다. 출국 전 누군가 '넌 지점 면허 취득하고 지점만 열면 돼.'라고 간단명료하게 목표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 간단명료한 일은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하진 않았다.
상황은 이러했다. 베트남 행정최고기관과 금융당국이 면허 발급에 대한 공감대를 가져야 하고, 그러려면 양국 간 외교 사안에 포함되어 그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법이나 규정에는 없지만 과거사례를 볼 때 대략 그런 결론이 나왔다. 그렇게 말로는 매우 짧게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남겨진 것은 일개 회사원인 내가 어떻게 '행정, 당국, 외교' 등의 태산(泰山)을 넘을 수 있을까 하는 큰 물음표였다.
씬깜언 (Xin cảm ơn) 감사해요.
큰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어 지점 면허를 받게 된 것은 행정최고기관과 금융당국의 협조가 결정적이었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 엄밀히 거기에 계신 두 분의 협조가 있었다. 첫인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애사에 조문도 가고, 경사에 축하도 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그 분들을 한국으로 초청해서 워크숍도 하고, 경영진과 면담도 마련했다. 그렇게 공감대를 만들어 가던 중 엄청난 기회가 찾아왔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베트남을 국빈 방문한 것이다. 양국의 공동선언문에 '금융기관 진출에 대한 상호 협력'이라는 문구가 들어가게 되면서 지점 면허 발급에 대한 공식적인 명분이 생겼다. 여기에 대사관, 한인회 및 상공인연합회 등 한국 커뮤니티도 힘을 보태줬다.
내가 남에게 복을 주지 못 하는 것이 항상 아쉽지만, 정작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게 나는 지점 면허를 받고 사무소장에서 지점장이 되었다. 정말 태산이 높다 하지만 오르고 또 오르니 못 오를 리 없었다. 모든 분들께 '씬깜언'이다.
씬로이 (Xin lỗi) 미안해요.
출국하기 전 주재원을 해봤던 선배를 만났다. 퇴근도 일찍 하고, 가족들과 시간도 많이 보내고, 여행도 다니고 등등 라 비 앙 로즈(La vie en rose)의 꿈을 엄청 심어주었다. 지레 마음이 설레고, 소원했던 가족들에게 점수도 좀 따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사람마다 그 양이 달랐다.
나는 이십여 년을 직장에 참 열심히 다녔다. 요즘은 나 같은 사람을 좀 딱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을 땐,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문장으로 '위대한 게츠비'를 시작한다. 나에게 유리한 입장이란 건 항상 없었으므로 열심히 하는 것을 택했을 뿐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환경이 바뀌어도 쉽게 변하지 못 한다. 베트남에서도 일에 집중한 나머지 가족들과의 장밋빛 인생을 살지 못 했다. 목표달성을 위해 어떤 곳이든 가고, 어떤 일이든 끼고, 누구든 만나야 했다. 그 사이 중학생 아이들은 어느덧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게 되었다. 혹 윤회 속에 기회가 온다면 나도 선택지가 많은 삶을 한번 살아보고 싶다. 가족들에게 '씬로이'하다.
에필로그
우리 가족은 5년의 세월을 여기서 공부하고 생활하다가 올 해 초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도 6년을 끝으로 내년 초 한국으로 귀임한다. 아쉬움이 남는다. 해외근무가 저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축복도 아닌 것 같다. 결국 자기 하기 나름이겠고 매 순간 후회 없이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베트남에서는 '되는 일도 없지만,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말이 전해진다. 물론 운도 많이 따라야겠지만, 내 해석은 이렇다. '될 때까지 안 했기에 되는 일이 없는 것이고, 된다고 믿고 도전했기에 안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의 하노이 6년은 살짝 합격선은 넘었다고 자만해 본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잘 있어요. 하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