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체험에서 소금만 뿌린 주먹밥을 아무리 먹어봐도 우리는 먼 중국 땅 언저리에서 스러져간 광복군 김 아무개의 고통을 알 수 없다. 농촌 체험에서 아무리 덜덜거리는 탈곡기에 볏단을 훑어봐도 태풍에 가로누운 볏단을 세우며 눈물 흘리는 농부 박 아무개의 슬픔을 알 수 없듯이 말이다. 그렇듯 새로운 시간을 살고 있는 또는 살아가야할 이들에게 누군가의 오래 전 이야기를 새겨들으라고 강요하는 자체가 희극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그냥 옛날 이야기로 들려주고 싶다.
이렇게 생긴 집도 있구나 하고 혼자 생각한 것은, 망치질과 톱질 소리가 요란한 새집 안으로 발을 디딘 직후였다. 말은 새집이라 하지만 실은 낡은 집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살던 꽤 멀쩡한 집을 뒤로하고 온 가족이 외가로 들어간 것은 이런저런 어른들의 이유 때문이었다. 외가는 먼 동네에 있어서 동네 아이들과 달리 버스통학을 하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랑거리였던 버스 손잡이에 손이 닿는 일은 검은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형들과 만원버스에서 몸싸움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하찮은 일이 되었다. 이러구러 중학교 2학년이 되었고, 그간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 난 목소리가 굵어지고 어깨도 벌어졌다.
머리도 굻어져서 부도, 압류, 사글세 등 어른들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런 단어들 간의 상관관계와 그것들과 관련되어버린 사람이 느껴야 하는 감정의 명암을 하나의 맥락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참 뒤에 그 때 당시의 나의 막막함보다 부모님의 답답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곧 나도 아버지가 되었다.
그 집 우리 방엔 골목으로 난 창문이 있었다. 나무 창틀에 뿌연 유리가 끼워진 창문을 열면 지나가는 사람의 머리꼭지가 내려다 보였다. 세 개의 구멍이 뚫린 브릭으로 지어진 집은비가 오면 빗물이 성근 브릭의 시멘트 입자 사이를 지나 방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방에서 홀로 앉아 있다 보면 솔직히 자신이 너무 형편없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쥐들이 천정을 뛰어다니는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서 결코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 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미진 이용원은 집 앞 골목길을 따라 끝까지 가면 있었다. 가위며, 의자며, 거울이며, 면도 거품을 내는 마법사 간달프 수염 같은 솔까지, 백년 넘게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그 물건들로 마치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머리를 만지던 이발사 아저씨는 그 동네의 통장을 맡고 있었다. 단층짜리 이발소 건물에서 청춘을 바쳤을 그의 타지방 사투리 묻은 목소리는 그가 성실과 절제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땅에 납작하게 깔린 그 동네에서도 사람들은 그 낮은 천정을 머리에 이고 세상을 살아내고 있었다. 지금도 덥고, 춥고, 좁고, 낮은 어디에선가 그것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듯이.
후줄근한 동네였다. 옆집에 세를 살던 젊은 부부는 밤마다 싸웠다. 아줌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저씨를 긁었고, 아저씨는 긁는 아줌마를 맞받아 긁었다. 아이는 매일 밤 울었다. 골목길 벽에 토악질을 하는 사람은 심심찮게 있었다. 늦은 밤 산동네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고개를 숙이고 걷는 그들에게서 들리지 않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약국, 쌀집, 전파상 등의 고만고만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지만 장사는 별로였다. 주변이 모두 어둠 속에 회오리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꽤 잘 버티고 있다고 항상 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대학진학을 하며 그 집을 뜨게 되었다.
사람의 머리는 참 희한하다. 어느 시점에서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느껴지던 것들도 세월이라는 청소차에 실려 두서없이 폐기 되어 간다. 이제는 얕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시절이다. 한가지 알게 되었다면 그 때가 어쨌든 간에 결국 우리는 현재를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인생 역경과 헌신을 위로하고 싶다. 그러나, 내 세대까지의 이야기를 후세에 길이 남기거나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이건 그냥 옛날 이야기다.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