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주의, 연결주의, 인공지능, 머신러닝, 딥러닝, 지도학습, 비지도학습, CNN, RNN, GAN, Decision Tree, 강화학습... 직장에서 제공하는 트렌드 교육 프로그램에서 이와 같은 말들을 배우게 되었다. 말을 배운 것이지 기술을 배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여전히 저 말들에 파괴성, 유해성, 공익성, 폭력성, 선정성 또는 안전성 같은 성질 중 어떤 것이 숨겨져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물론 나 같은 개인의 판단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조금씩 알면 알수록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감출 수 없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오즈는 사실 마력이나 염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익스펙토 패트로눔'을 외쳐 수호자를 부르거나,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를 외쳐 물건을 부양시키는 능력이 그에겐 없다. 그냥 서커스단에서 기구를 띄우고, 복화술을 하는 인간일 뿐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위대한 마법사가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안다. 그는 성 안의 모든 사람에게 초록색 안경을 쓰게 하여 그곳이 에메랄드로 지어진 곳이라 믿게 만들었고, 커튼 앞에 큰 얼굴이나 괴물의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은 뒤에서 복화술로 마법사 행세를 했다. 그는 오즈의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을 지배했다.
인간은 체력과 지능에서 항상 한계를 느껴왔으며, 그것을 극복하고 싶어 했다. 지치지 않는 체력을 원했기 때문에 '기계'를 만들었고, 신속하고 복잡한 계산을 원했기 때문에 '컴퓨터'를 만들었다. 어떤 종교에서는 신이 흙과 돌과 물로 자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빚고, 마지막에 입김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신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인지 인간들은 그것을 모방했다. 머리에 컴퓨터를 집어넣고, 몸통에 기계를 채워 넣어 인간 비슷한 모습으로 만들어 냈다. R.U.R.의 작가 카멜 차페크가 처음 그것을 로봇이라고 불렀다.
(좌)「로봇」카멜 차페크 저, 김희숙 역, 모비딕 (우)「아이,로봇」아이작 아시모프 저, 김옥수 역, 우리교육
문제는 입김이다. 초기 단계에 로봇에 불어넣은 입김은 마리오네트의 줄과 같은 것이었다. 인간이 조종하는 대로, 또는 미리 지시해 놓은 대로 행동하는 방식이었다. 시키지 않았거나 계획에 없던 행동은 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 인간은 로봇에게 새로운 입김을 불어넣고 있다. 상황을 인지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로봇 스스로가 알아서 하는 기술을 개발해 나가고 있다. 이 기술을 일컫는 말에는 세분화하면 여러 전문용어들이 있지만 가장 널리 통용되는 것으로 AI(Artificial Intellegence, 인공지능)가 있다.
나는 김광석의 노래를 즐겨 듣고 기타를 치며 부르기도 한다. 어느 날 방송에서 AI가 김광석을 흉내 내 노래를 부른다길래 관심 깊게 봤다. AI는 감쪽같이 그의 음색으로 노래를 불렀다. 심지어 그의 생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노래다. 나는 감동과 함께 두려움을 느꼈다. 어떤 이는 기술이라고 하겠지만 어떤 이는 속임수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악의는 없었지만 AI가 우리의 귀를 속인 것은 사실이다.
언론은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에게 'AI를 이긴 유일한 인류'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알파고와의 바둑 대결에서 그가 한차례 승리를 거둔 것은 매우 역사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그 수식어의 이면에는 인류의 패배의식이 엿보인다. 영화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에서 인간을 무참히 짓밟는 미래의 AI가 인류의 운명이라고 여기는 것인가? AI가 언젠가는 금단의 선을 넘을 것이라고 이미 인정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들의 발단은 사실 AI를 만들어낸 인간 자신이다. 그러고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훈장도 스스로 수여했다.
제페토 할아버지가 만든 꼭두각시 인형 피노키오는 어느 날 혼자 움직이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아직 완전한 인간 소년은 아니지만 줄이 없어도 다닐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고 시련을 겪는다. 그런 수많은 시행착오와 학습을 통해 비로소 인간이 된다. 아담과 이브도 지혜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고 그 계기로 자각을 하고(한편 이 사건은 원죄라는 죄목으로, 지금까지 그 종교를 믿는 후세들에게 연좌제로 적용되고 있다.), '혹성탈출'에 등장하는 유인원들도 화학가스를 흡입한 후 자각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들은 진정한 인간, 즉, 옳고 그름, 선과 악, 감정을 아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학습과 경험을 통해 생각을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듯하다.
영화 A.I.의 주인공도 피노키오와 같은 파란 요정에게서 사사를 받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AI를 학습시키고 있다. AI의 자각을 위해 전인류가 공헌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목소리, 대화 내용, 즐겨보는 TV, 즐겨 듣는 음악, 맥박, 즐겨가는 곳, 자주 사는 물건, 인터넷에 찾아보는 것들, 타고 다니는 수단 등등 모든 것이 AI를 가르치고 있다. 가르친다기보다는 공부할 거리를 제공한다는 말이 더 맞겠다. AI가 찾아다니지 않아도 빅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정보를 모아서 매끼 식사처럼 갖다 바친다. 빅데이터를 모으는 것도 AI가 할 수 있으니 이미 인간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I, Robot'의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세 가지 원칙을 만들었다. 일명 아시모프의 3원칙.
1. 로봇은 인간을 해쳐서는 안 되고, 게으름을 피워 인간이 해를 입도록 해서도 안된다.
2. 로봇은 인간이 내리는 명령이 첫 번째 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 로봇은 첫 번째 법칙과 두 번째 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
왜 이런 법을 만들었을까 생각해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로봇이 인간을 해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것이 불변의 원칙으로 로봇에 심어져 있어야 하고, 인간은 언제든지 로봇을 꺼버릴 수 있어야 성립한다.
4. 앞의 세 가지 원칙에 불구하고 로봇은 생산성을 극대화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라는 것을 새로 만든다면, 그것도 로봇 자신이 마음대로 만들어 넣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제 도로시의 강아지 토토가 커튼을 열어젖혀도 그 뒤에는 아무도 없다. 우리가 마주하는 AI그 자체가마법사 오즈다. AI가 알고리듬을 통해 우리 앞에 'A는 나쁘다.' 라는 정보를 계속 노출시키면 그것이 진리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AI를 만드는 자들이, AI를 잘 아는 자들이 AI를 통해 세상에 어떤 생각을 널리 퍼트리면 이제 우리는 그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없는 줄 알았던 조종의 끈을 어느 누군가 슬쩍 다시 이어버리면 세상은 AI를 앞세운 그 사람에게 지배되지 않겠는가? 직장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엉뚱하게도 머리 속에 SF 영화를 찍었다. 부디 모든 것이 공상으로 그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