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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별 Nov 18. 2021

우울할 땐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밤길을 걷고 있는 나에게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 늦게 퇴근한다. 매일 상쾌한 새벽길과 달빛 내리는 밤길을 걷는다. 꽃길도 부럽지 않은 내 밤길을 나는 사랑한다. 한시간 걸리는 출근길은 독서도 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라 좋다. 선배들과 함께 야근하고 퇴근하면 맘이 뿌듯하다. 가끔 부장님께서 '멧별씨는 야근도 하고 참 열심히 사는군.' 같은 말을 해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가진 것에 만족하고 과욕을 부리지 않는 삶,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살기 빠듯하지만 이렇게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오늘도 희망을 품고 힘차게 출근을 한다.


한 이십 년 전 젊은 나는 그랬다. 한 이십 년 후의 나는 이렇다. 여전히 날 밝기 전 출근을 하고, 날 저문 후 퇴근을 한다. 그래서 이 겨울 매일 밤길을 걷는다. 들 꽃길만 걸으라고 하는데 난 밤길만 걷고 있다. 표현하기에 따라 항상 그렇다 라고도, 아직 그렇다 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보기 싫고 듣기 거슬리는 것들이 늘어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인다. 보기 싫은 것이 혹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울해지기도 하고, 듣기 거슬리는 것이 혹 피해의식에서 오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기도 하다. 믿기지 않는 나이를 의식해서 오는 변화인것도 같고, 최근 겪은 신상의 변동이 원인인 것도 같다. 너무 먼 곳에서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만것일까?


예전에 잘 안 쓰던 말로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쓰는 말이 있다. '참 열심히들 산다.'라는 말인데 얼핏 듣기엔 좋은 말로 들린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서 불한당들이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비아냥거리는 말이다. 자신들은 열심히 안도 잘먹고 잘사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애쓰며 사냐는 말이다. 이걸 꼭 불한당들만 쓰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고보니 나도 참 열심히 는 스타일이다.


높아져만 가는 한국의 위상에 또 커져만 가는 것이 있으니 바로 빈부격차다.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빈부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백여년 전 귀천을 부정하는 십자가에 매혹되어 빈부를 불문하고 그 아래에 모였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 십자가 아래 모여 있지만 예배당의 빈부를 따지고 집의 귀천을 말하고 있다. 초면에 묻지도 않은 본인의 집주소, 아파트 매입가, 현재가를 례대로 알려주며, 왜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내 집주소물어보는, 그런 람들의 세상에 살고 있다. 젊은 시절 가 부자 나라에서 잠시 하숙을 했을 때 그 집 일곱 살 아들내미가 '한국엔 있어요? 우린 있는데. 한국엔 TV 있어요? 우린 있는데.' 이러던 장면과 데쟈뷰가 느껴진다. 


스타는 되고 싶은데 힘든 연습은 하기 싫은 사람들도 있다. 악당도 많다. 본인은 너무 편안한데 주변 사람들은 너무 불편하다면 그자가 악당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렇게 돌아온 정글에는 언제봐도 사나운 호랑이, 내 목숨을 노리는 구렁이, 어깨에 힘을 준 고릴라,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토끼들이 살고 있다. 여기서 나도 어떻게든 또 살아야 한다.


그가 알려준다. "당신 인생은 XY좌표로 (-10,-10)입니다." 내가 묻는다. "X는 뭐고 Y는 뭔가요?"

그가 답한다. "X는 경제적, Y는 사회적 지위입니다."

내가 작은 소리로 묻는다. "저보다 더 왼쪽 아래에 위치한 사람도 있나요?"

그가 빠르고 단호하게 말한다. "없습니다."

"그렇군요. 적어도 (2, 3)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용기내어 소리쳐 본다. "내가 뭘 잘못한거죠?"

그는 담담히 말한다. "과거에 뭘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저 좌표 자체가 잘못입니다. 억지로 희망적인 면을 찾자면 당신이 (-15,-15)에서 시작했다는 사실 정도가 되겠습니다. 당신은 잘못했지만 참 열심히도 살았습니다."

나는 에서 깬다.


나는 지금 뭐가 부족할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다. 아내와 자식들이 있고, 부모님도 계시고, 친구들도 있고, 사는 집도 있고, 도 있고, 직장도 있고, 의료보험에 국민연금도 있고, 건강에 큰 문제가 없고, 취미로 기타도 치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으며 잘 살고 있다. 다가 브런지 작가이며, 심지어 넷플릭스 계정까지 있다. 그 많은 소유에도 불구하고 주위를 맴도는 우울향기 아마도 모든 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자의 비교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다. 나는 진짜 뭘 잘못한 걸까?


이런 생각들이 나를 가라앉힐 때 나는 클래식 기타를 든다. 30년 넘게 연습만 하고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악보를 펼친다. 칠 줄 아는 건 딱 소절,   마디 치면 사실 무슨 곡인지 알기도 힘들다. 그런 연주 하고, 아있는 기나긴 악보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직 가야할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열심히 습해야겠다는 의욕이 생긴다. 아직 더 나아질 여지가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그럴 시간도 아직 남아다. 괜찮다. 다 괜찮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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