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불문은 불가(佛家)에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여섯 개의 문(六佛門)이란 뜻이 전혀 아니다. 육불문은 한자로 六不問(육불문)이라고 쓴다. 여섯 가지를 묻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이 한자의 문법이나 어순에 맞는지는알 수가 없다. 인터넷에 등재된 육불문 콘텐츠를 보면 젊은 사람이 포스팅한 것 같지는 않다. 연세 지긋하신 분들 사이에 자주 일어나는 설화(舌禍)를 개탄한 어떤 계몽가가 올린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 육불문은 다음과 같다.
[육불문] 여섯 가지를 묻지 말라 1.가족근황, 특히 배우자 안부를 속속들이 묻지 말라 2.경제사정, 빚쟁이 살림살이를 속속들이 묻지 말라 3.건강상태, 오랜 지병을 속속들이 묻지 말라 4.친소관계, 친구들과의 우정을 속속들이 묻지 말라 5.정당관련, 여야와 피아, 동지와 정적을 속속들이 묻지 말라 6.과거오류, 옛 허물을 확인하듯 속속들이 되묻지 말라
전통적으로 한국인의 오지랖은 따뜻한 인간애의 발현이라고도 하고, 농경사회의 집단 거주가 낳은 DNA라고도 하고, 개인의 삶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여 발생한 사회문제라고도 한다. 그런 분석이야 의도에 따라 말만 잘 갖다 붙이면 긍정적으로도 또는 부정적으로도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쪽은 오지랖을 뒤집어쓰게 되는 상대방의 기분이다. 오지랖의 발현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데 무차별적이고 무절제하다. 쉽게 말해 남의 아픈 데를 콕콕 찌른다는 뜻이다.
상황극을 만들어 보자. 김 씨와 박 씨는 학창 시절 꽤 친한 친구였지만 중장년 시절 거의 만날 일이 없었다. 은퇴 후에야 한번 만날 자리가 마련되었다. 김 씨가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제수씨는 건강하지? / 작년에 먼저 갔어.
어쩌다가? / 암으로.
그런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하지 그랬어? / 경황이 없어서 미안하게 되었다.
병원비도 엄청 나왔을 텐데. 암보험은 들었냐? / 그게 집 살 때 다 해약하는 바람에 좀 힘들었어.
돈 쓴 보람도 없이 그렇게 되었구나. 그럼 대출받았어? / 1억 넘게 받았지. 지금도 남아 있어.
너는? 너는 아픈데 없지? 나는 건강검진하니까 의사가 정말 깨끗하다던데. / 혈압에 당뇨에 약을 몇 개 먹어.
젊었을 때 관리를 했어야지. 운동은 하냐? / 그러게. 바쁘게 사느라.
집은 어디야? / 파주. (작가가 사는 곳이다.)
응? 어쩌다가? / 거기에 집을 사서 이때까지 살았어.
난 강남에 작은 아파트. 집값이 ㅇㅇ억인데 세금을 엄청 때려. 정부 개새끼들. / 그렇구나. 많이 들어가겠네.
그래서 너도 이번 대선에 투표 잘해. ㅇㅇ당 찍을 거지? / 난 ㅁㅁ당인데.
야. 너 생각 잘해. 넌 옛날부터 학생운동한다고 어머니 속도 많이 썩였지? / 그러게.
동창 중에 왜 오징어라고 정치한다고 설치고 다니던. 지금 뭐하냐? 너 친했잖아? / 걔 몇 년 전에 죽었어.
아. 절친인 네가 많이 힘들었겠네. / 절친은 뭐. 걔가돈을 좀 빌려 갔는데, 그렇게 되어 버려서.
정말 꼼꼼하고 알찬 대화다. 저런 사람이 어딨냐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과연 저런 사람이 주변에 한 명도 없냐고 반문하고 싶다. 알려진 노래 가사에도 이런 류의 대화가 나올 정도로 우리는 이런 일에 익숙하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아기 엄마가 되었다면서.
밤하늘에 별빛을 닮은 너의 눈빛. 수줍던 소녀로 널 기억하는데.
그럼 넌 어떻게 지내고 있니? 남편은 벌이가 괜찮니?
자나 깨나 독신만 고집하던 네가 나보다 먼저 시집갔을 줄이야.
['여행스케치'의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오랜만에 만나서 그럼 무슨 얘기를 하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겠다. 저럴 거라면차라리 안 만나는 게 낫지 않을까? 노래 2절은 그런 차원에서 다소 반성의 기미가 보인다. 옛날 함께 했던 얘기들로도 충분히 대화가 된다는 말이다.
지금도 떡볶일 좋아하니? 요즘도 가끔씩 생각하니?
자율학습시간에둘이 몰래나와사 먹다 선생님께 야단맞던 일
한국에는 항상 열풍이 분다. 골프 열풍, 부동산 열풍, 주식 열풍, 캠핑 열풍, 해외여행 열풍, 스키 열풍, 와인 열풍, 막걸리 열풍, 가상화폐 열풍. 어떤 물건이나 일이 엄청난 관심과 호응을 받으며 전국적으로 대유행하는 것이다. 열풍은 그것을 가지거나 하지 않으면 도태되거나 매장되는 기분을 느낄 정도로 매우 상대적이고 배타적으로 분다. 일단 열풍이 불면 그 바람에 잘 순응하고 있는지 서로를 탐색한다. 그거 아직 없냐, 그거 아직 안 해봤냐, 이제는 슬슬 시작해야 하지 않냐. 그리하여 사람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해 본 자와 못 해 본 자로 양분한다. 종국에는 진심으로 그것에 무관심하던 사람이나, 정말 현실적으로 그것을 할 여건이 안 되는 사람까지 기어이 동참하게 만들어 버린다. 빚을 내거나 모조품으로라도 구색을 맞춰야 살 수 있다.
리카도는 국제무역의 발생을 비교우위라는 개념으로 설명지만, 한국에서는 국가 안정의 근간이 비교우위인 것 같다. 남보다 비교적 우위에 있어야 살맛이 나는 심리상태. 그래서 항상 남을 의식하고, 남과 나를 비교하며, 본인이 뒤쳐지지는 않았는지 걱정한다. 그리하여 최대 다수의 사람이 최대의 행복과, 나아가 우월감까지 느끼는 상태가 되면 비로소 나라가 평화로운 것이다. 하지만 절대 소수의 사람은 최소의 행복을 누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바, 그 작고 초라한 행복은 우울을 낳고 언제든 분노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가장 흔한 탐색의 도구가 바로 질문이다. 탐침봉 같은 질문들을 쑤셔댄다는 것은 상대에게 '화를 내라, 화를 내라'하고 주문을 외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렇게 상대를 침몰시키고, 화나게 해서 얻은 우쭐함을 원동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유로 취미나 관심사들은 개인별로 비교 가능해야 한다. 즉 계량화해야 한다는 것인데 제일 좋은 방법은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다. 등산, 골프, 캠핑, 사이클링 등이 장치산업이라는 농담은 결국 돈을 처발라 장비 빨을 세우고 있다는 말인 것이다.
김 씨와 박 씨는 이런 대화를 나눌 수도 있지 않을까?
넌 여전히 표정이 웃는 상이구나. 하나도 안 변했네. / 너도 여전히 옷맵시 좋고 멋지네.
뭐 이제 많이 늙었지. 난 혈압에 당뇨에 건강도 별로야. / 나도 마찬가지야. 이제 그럴 나이지.
객지 생활에 자리 잡느라 고생 많았지? 지금은 어디 살아? / 나는 파주에 아파트 분양받아서 계속 살고 있어.
잘했네. 요즘도 기타 치냐?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거 참 많이 했는데. / 여전히 취미로 해.
대단하네. 언제 같이 한번 맞춰 보자. 나도 취미생활이 있어야겠어. 오징어도 같이 하면 좋겠다. / 오징어 몇 년 전에 먼저 갔어.
아 그랬어? 친구가 세상 뜬 것도 몰랐네. 미안하다. 야. / 뭘 미안해. 어렵게 살다 갔어. 잘 연락도 안 됐지.
그래. 다 사는 게 그래서 맘은 있어도 막상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지. / 그래도 너 만나니 옛날 생각도 나고 좋다. 우리 와이프도 반가워할 거야.
아. 잘 계시냐? / 좀 아픈 데가 많기는 해도 괜찮아. 잘 지내.
육불문의 원칙을 지키고, 상대를 존중하고,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내 마음을 먼저 열고, 상대방이 맘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대화. 친하다고 느끼는 사이일수록 그런 것들은 더 지켜져야 할 것 같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육불문이라는 말을 접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우리가 꼭 인생을 마트에서 파는 감자처럼 저울에 달고 가격표를 붙여서 서로 비교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육불문을 잊지 말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