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 gotta do to make you love me?'로 시작하는 엘튼 존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를 들으면 그곳이 생각난다. 스무 살의 어느 여름날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맥주를 마시고 놀던 때가 있었다. 방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어둠이 깔리고 친구가 무심하게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려놓은 순간, 방 한 켠에 완벽하게 자리 잡은 태광 에로이카 전축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홍콩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약간 몽환적인 그 방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무솔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초입에 나오는 '프롬나드'는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멜로디다.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면 학교 앞에 실제 있었던 카페가 하나 떠오른다. 그 카페의 이름이 '전람회의 그림'이다. 우리는 이런 농담을 하곤 했다. 소개팅을 하는데 미대 다니는 여학생에게 잘 보이려고 분위기 있는 카페 '전람회의 그림'을 갔다. 그런데 남학생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웨이터에게 물었다. '저, 죄송한데 전람회의 그림은 어디에 걸려 있나요?' 웨이터는 그런 질문 수없이 받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예 손님. 지금 듣고 계십니다.' 지금도 그 음악을 들으면 그 카페가 떠오른다.
영화 'Now and Then'의 삽입곡 'Knock Three Times'를 들으면 그날 밤 그곳이 생각난다. 호주 멜버른에는 '로열 보테니컬 가든'이 있다. 넓고 아름다운 식물원인데 시민들을 위해 야외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지금의 이름은 'Moonlight Cinema'인데 그때도 그랬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피크닉 장비라곤 깔고 앉을 담요 한 장 뿐이었던 친구들과 그 공원 잔디밭에 널브러져 영화를 봤다. 가끔 그 노래가 흘러나오면 나는 그 공원의 정취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곳들은 마치 사진처럼 내 기억에 남아있다. 음악은 종종 이렇게 장소를 소환하곤 한다.
네 명의 친구들은 자전거 앞에 매달린 저 노란 라디오로 'Knock three times'를 듣는다. 'Twice on the pipe'라는 가사에서는 자전거 벨을 두 번 울린다.
'Oh Carol, I am but a fool.'로 시작하는 닐 세다카의 'Oh, Carol'이 흐르면 난 젊은 여인이 떠오른다. 내가 닐 세다카 히트곡 카세트테이프를 그녀의 생일 선물로 줬기 때문이다.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 멀리 뱃고동이 울리면'으로 시작하는 김창완의 '안녕'이 흐르면 난 또 그 젊은 여인이 떠오른다. 내가 코드 3개로 칠 수 있는 그 곡으로 그녀에게 기타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현악기들과 관악기들이 힘차게 어우러진 '위풍당당 행진곡'이 흐를 때도 나는 그 여인이 떠오른다. 어느 날 저녁학교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야외무대 위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그 곡을 같이 들었기 때문이다. 금난새가 지휘하고 있었다.
'Tale as old as time'으로 시작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의 OST가 흐를 때조차 나는 그 여인을 떠올린다. 둘이 극장에서 그 영화를 봤고 내가 일본 여행을 갔다 올 때 OST CD를 선물로 사 왔기 때문이다. 동경의 Tower Records로 기억한다.
그녀는 내 아내, 박씨 부인이다. 음악은 종종 이렇게 사람을 소환하곤 한다.
CD를 일본에서 사 왔는데 그녀에게 CD플레이어가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항상 그렇게 좀 모자란 동반자였던 것 같다.
'Nessun dorma, Nessun dorma'로 시작하는 오페라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들으면 그때가 떠오른다. 그날 우리 가족은 해설을 곁들인 오페라 아리아 콘서트에 가서 그 곡을 들었다. 자신과의 결혼을 거부하는 투란도트 공주를 옭아매기 위해 칼라프 왕자는 자기 목숨을 걸고 문제를 낸다. 그러곤 절대답을 찾지 못할거라 장담하면서 공주와 신하들은 오늘 밤 아무도 잠들지 못할 거라며 이 노래를 부른다. 그날 탤런트 김지호가 한 해설에 따르면 그렇다.
'Sold! Your number sir? Thank you.'로 시작하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 경매번호 666번 샹들리에가 등장하는 순간의 웅장한 서곡을 들으면 그때가 떠오른다. 우리 가족은 샤롯데씨어터에서 두 번에 나누어 그 곡을 들었다. 처음은 부모, 다음은 자식. 다소 경제적 이유가 있었다. 처음 접한 뮤지컬 무대가 가족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이던 날이었다. 우리는 그 뒤로 뮤지컬 '맘마미아'도 같이 보고, '레미제라블'도 같이 보게 된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으로 시작하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들으면 그때가 떠오른다. 이 노래는 '부산 갈매기'와 더불어 롯데자이언츠의 대표 응원가 중 하나다. 고향을 떠나서, 일이 바빠서, 애들을 키우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프로야구를 어떤 계기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들도 야구 글러브를 낄 수 있는 나이가 되어 함께 캐치볼도 하고 잠실, 문학, 목동 구장을 열심히 쫓아다녔었다. 당시 롯데 포수 강민호도 만나고 글러브에 사인도 받았다. 처음 간 잠실구장에서 팬들과 함께 이 노래를 떼창 하는데 나도 모르게 복받치는 감정에 목이 메었던 생각이 난다.
그때, 어린 자식들과 함께 해서 참 좋았다. 음악은 종종 이렇게 시간을 소환하곤 한다.
'오페라의 유령' 경매 장면. 'Your number sir?'하는 대사는 푸른하늘의 '자아도취'라는 곡의 앞에 나온다. 유명한 저 원숭이 인형은 경매번호 665번이다.
'Once a jolly swagman'으로 시작하는 호주의 국민노래 'Waltzing Matilda'를 들으면 졸업식에서 벤조를 연주하며 이 곡을 함께 부른 Don Oliver 선생이 떠오른다. 'Almost heaven West Virginia'로 시작하는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를 들으면 멜버른 Geebung Polo Club에서 Fat Cats 밴드의 무대로 초대되어 이 노래를 불렀을 때가 생각난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으로 시작하는 '소양강 처녀'를 들으면 대학교 때 막걸리 마시고 둘러앉아 노래 부르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으로 시작하는 가곡 '보리밭'을 들으면 클래식 기타 동아리발표회의 멋진 기타 오케스트라가 생각난다.
Brothers Four의 'Green Fields'라는 곡을 들으면 여름방학 때 러닝셔츠 차림으로 교육방송에서 그 노래를 배우던 중학생 내가 생각난다. 'The Rose'라는 곡을 들으면 영어 특활반에서 그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부르던 내가 생각난다. '첫눈이 온다구요'가 나오면 눈 오는 어느 날 좋아하는 미술 선생님 댁을 찾아가며 그 노래를 들었던 까까머리 내가 생각난다. 클래식기타곡 '로망스'를 들으면 독학으로 익혀서 처음 이 곡을 완주하고 기뻐하던 15살 내가 생각난다. '참새의 하루'나 '담배가게 아가씨'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에서 송창식이 그 음반을 처음 발표하고 노래하던 일요일 밤을 떠오르게 한다. 'The greatest love of all'을 들으면 고등학교 때 작고 낡은 방에서 LP로 이 노래를 들으며 희망을 생각하던 사춘기 시절이 떠오른다.
ABBA는 'Thank you for the music'이라는 노래로 나의 음악에 대한 이런 느낌을 공감해 주었다. 인생의 순간순간을 음악으로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인 것 같다. 앞으로도 많은 순간을 음악으로 기억했으면 한다. 음악이 사치로 여겨질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음악이 흐르면 난 다시 내가 되고, 또 살아갈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