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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별 Jul 02. 2023

눈물 어린 출근길

그래도 그들과 함께라면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아직도 새벽어둠이 가득한 제2자유로 어딘가를 달리고 있던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죽음을 앞둔 월선은 용이의 품에 안겨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요즘 사람이 보면 분명 사랑하는 사이인데, 부부의 연으로 맺어지지 못하는 시대를 살면서, 두 사람의 마음은 썩어 문드러졌것이다.


저 대화는 박경리 선생님의 대하소설 '토지'의 한 부분이다. 나는 이 소설을 매일 출퇴근길에 탐독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탐청하고 있다고 해야 맞겠다.

사위 김지하 출소에 손자를 업고 교도소에 마중 나온 박경리 선생님. 김훈 선생님도 기자 시절 이 장면을 직접 본 기억을 수필에 적었다.

상당히 오래전 이야기지만, 의 1세대 '마트폰으로 책 읽기'는 회사가 제공해 주는 전자책 플랫폼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TTS(Text-To-Speech, 음성합성, 스마트폰의 텍스트 읽어주는 기능)를 몰랐던 때는 전자책을 열어서 직접 었지만, 나중에 맘에 드는 전자책을 다운로드하고 TTS로 듣게 되었다. 말하자면 1.5세대 정도 되겠다.


그다음은 재능 있는 분들이 너튜브에 등재해 놓은 콘텐츠를 듣는 거였는데, 추리소설, 단편소설, 현대소설 등 시대와 형태를 다양히 하여 들었다. 그때는 한참 걷기 운동을 하던 때라 지루한 운동시간에 책 듣기는 더할 나위 없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전문적으로 책을 읽어주는 플랫폼의 시대가 도래했다. 성우들 전달력 좋은 음색과 발성으로 읽어주는 책들은 더욱 실감 나고 흥미진진하다. 내가 듣고 있는 '토지'는 경상남도 하동의 진한 사투리를 기본으로, 전라도, 함경도, 평안도 등 다양한 사투리를 맛깔스럽게 구사하는 성우들의 재주가 더해져서 지루할 틈이 없다. 무려 스무 권에 달하는 대하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내는 우리 가족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사는 동안 '토지'를 완독 했다. 한국을 떠난 해외생활에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해갈이 되어준 '하노이 한인회 도서관'에서 스무 권을 차례차례 빌려서 읽었는데 그 노력과 인내가 대단하다.


한 번은 비즈니스 목적으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베트남 '응에안'이란 지역을 찾아갔다. 거기는 호찌민 주석의 고향으로도 유명한데, 방문했던 한국 기업의 법인장님 방에서 책장에 꽂혀있는 스무 권의 '토지'를 발견했다. 타국의 외진 지방성에 위치한 일터에서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이겨낼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는 '토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하동 평사리의 부호, 최참판 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녀 최서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해방과 함께 끝이 난다. 최서희가 조준구를 피해 평사리 사람들과 함께 간도로 가고, 하인이었던 김길상과 결혼을 하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 진주로 돌아오고, 조선 땅 여기저기의 사람들과 엮게 되고, 기성세대들이 하나둘씩 죽고 그다음 세대들이 중장년이 되어가는 가운데, 일제의 수탈과 폭정을 견디고 해방을 맞이하는 장엄한 역사를, 소설은 담고 있다.


대소와 강약과 귀천과 빈부와 남녀와 노소는, 그 '차이'를 없애고 극복하고자 지금까지도 인간들이 애쓰고 있는 '다름'이다. 이 다른 양극은 소설 전체에서 끝없이 갈등하고 대립한다. 신분제가 폐지되고, 갑질을 금지하고, 양성평등을 외치고, 어린이날을 제정해도 세상에서 이 다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노력 중이고, 끝없이 노력해야 이 갈라짐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소설은 동시대를 살아온 박경리 작가의 통찰력으로, 언제 어디나 있을 인간군상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거울을 보는 듯한 이야기가 우리를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다.


120년 전에 시작된 이야기를 아침저녁으로 약 한 시간씩 들으며, 내가 거기 있고, 내가 죽고, 내가 사는 매 순간에 웃고 또 눈물짓는다. 차의 시동을 걸기 전에 설레는 마음이 있으며, 시동을 끌 때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하루 시작의 불안과 하루 마감의 긴장이 '책 듣기'로 풀린다. 그래서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 준다.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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