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지하철에서 갑자기 여성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무시무시한 지하철 내 사건들로 학습되어 온 뇌는 순간 움찔했다. 무슨 일일까?
상황을 둘러보니 가까이 있던,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검은 마스크를 쓴 사내가 구토를 한 것이었다. 한순간에 주변은 홍해가 갈라진 듯 사람들이 비켜서면서 엉망이 된 바닥이 드러났다. 폭탄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하철에서 뛰어내리거나 바닥에 엎드리진 않아도 되었다. 그래도 여러 가지 불편한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는 지하철 객차를 사람들은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인내심이 강하거나 주변 일에 관심이 없거나 등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추측한 것은 '다들 도망칠 여유가 없어서'였다.지각은 안되니까.
Bus, Metro, Walking. B.M.W.
25년 넘게 직장을 다니며여러 경로의 길로 출근을 했다. 꼬박꼬박 달력들을 채워나가는 여정은 누구 말대로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대략 아침 6시부터 9시 사이에 일어나는 이 일정은 서울시의 통계에 따르면 평균 53분이 소요된다고 한다. 서울에서 서울로는 44.7분, 경기도에서 서울로는 72.1분이 걸린다. 이 27.4분 차이를 놓고 경제, 사회, 문화적 갈등이 발생한다.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아찔한 순간들도 있었고, 재밌는 에피소드도 있었고, 자괴감이 들던 찰나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일도 있었다. 생리적 현상은 물론이고 비나 눈같은 자연현상도 출근길을 막아섰다. 그때마다 해결책이 있었다기 보다는 그냥 흐르는 시간과 운명에 몸을 맡겼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길바닥 위에 펼쳐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날은 또 지하철을 벗어나 걸어가던 중, 8차선 대로 위에 차가 멈춰버린 분도 보게 되었다. 연식이 있어 보이는 봉고 차량이 고장으로 서있고, 연식이 있어 보이는 분이 수신호로 차량들을 비켜가게 하고 있었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었을 텐데 움직이질 못하고 어딘가 전화통화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세상이 웃긴 건, 내가 그때 측은한 맘으로 그분 걱정을 할 수는 있었지만, 사실 그분은 중소기업 사장님으로 남부러울 게 없는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판단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구토의 주인공도 람보르기니가 고장 나서 지하철을 탔는데 낯선 환경에 멀미가 났을 수도 있다.
지금도 지하철을 타고 있다. 저녁을 먹고 버스를 탈 것이다. 부디 아무 일 없는 여정이 되기를 빌어본다. 같이 탄 모든 플레이어들에게도 편안한 귀가가 함께 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