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먼저 드는 생각이 참 무책임하다. 이놈의 내비게이션이 멍청하게 나를 이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구나. 두 번째 생각이 내가 어떤 이벤트나 공사안내를 놓친 건가 하는 것이고, 세 번째나 와서야 무슨 사고라도 났을까 하는 것이다.
찔끔찔끔 한참을 가다 보니 119란 빨간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사고 차량은 없고 구급대원들이 강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잠시 사고회로가 멈칫멈칫하다가 '아! 누가 뛰어내렸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게 차들은 그곳을 지나가고, 이후로 교통은 평상시 속도를 회복했다. 아마 다리 아래 강물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흘렀을 것이다.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그 광경을 본 운전자 중 몇 명이나 그 사람의 행방을 궁금히 여겼을까? 그날 밤 인터넷을 조회해도 그런 뉴스는 없었다. 그의 투신은 세상에 아무 흔적과 의미를 남기지 않고, 교통체증이라는 사회현상으로 치환되어 일부 사람들의 불편으로 기억되었다.
객지에 내동댕이쳐진 나는(내가 나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것이지만) 궁상스러운 삶을 살았다.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직장이 있었지만, 생활비는 항상 마이너스 잔고를 유지했다. 유지라는 말은 어떤 만족스러운 수준의 상황이 계속되는 느낌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빚에 허덕였다.'라든가 '적자인생을 살았다.'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궁상스러운 면이 있어 피하고자 한다.
절약, 근면, 검소 등의 허울을 쓰고, 궁상을 떨라치면 가장 힘든 것이 밀려드는 자괴감이다. 이 오욕의 삶을 끝내는 그날은 올 것인가? 과연 그 끝엔 무엇이 있을 것인가?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할 것인가? 가끔씩 쪽팔려서 못살겠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의 진전을 가지며 인생은 계속되었다. 큰 진전은 없었다고 봐야겠지만, 그렇다고 중단되거나 탈선하지는 않았다. 그 사람도 나처럼 용기내고 무릅쓰고 살았으면 좋았을걸. 쪽팔림도 순간이라 여기며 좀 더 뻔뻔스럽게 머리를 쳐들었다면 좋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