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이라는 지명은 취업 면접 장소로 통보받기 전까지들어본 적이 없었다. 홈페이지 공지를 통해 일산에 있는 연수원, 이름하여 일산연수원으로 아침 일찍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하루 전날 부산에서 야간 고속버스를 타고, '고터'에 내려서, 3호선 첫차를 타고 주엽역으로 갔다. 거기서 회사에서 제공한 전세버스를 타고 고봉산 자락에 있는 일산연수원으로 갔다. 대한민국의 동남쪽 끝에서 서북쪽 거의 끝으로 온 것이다. 고터에는 각 지방에서 올라온 취준생들이 비슷비슷한 모습을 하고 모여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슈트에 구두를 신고 지하철을 기다리던 그들은 그렇게 교대역, 을지로, 주엽역으로 면접을 보러 떠나고 있었다.
나는 지방국립대를 졸업했다.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지원해보려 했지만 성적이 100% 안정권이 아니었고, 주위의 다른 이유도 있어서 써놓은 지원서를 파기했다. 입학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안정권에 있는 학과에 지원했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도 실패였다. 과수석을 해야 전액 장학금을 받고 일정 학점 이상이면 계속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데, 차석에 그치고 말았다. 1학년 때 그런 것들이 창피하고, 속상하고 그랬다. 그러면서도 친구들과 선배들과 함께 하는 학교생활에 점점 적응하고 익숙해져 갔다. 여자친구도 생겼다. 그렇게 군대 가고, 복학하고, 취직용 학점 따고, 토익성적 올리고, 이런저런 알바도 하며 졸업반을 맞았다. 그 해 1997년 IMF 구제금융의 시대가 닥쳤다. 그래도 어찌어찌 회사에 취직해서 지금까지 25년 넘게 다니고 있다.
부산은 나름의 모습이 있다. 아파트를 새로 지어 올린 지역도 있지만, 오래된 도시인만큼옛날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많다. 산이 많아 평지가 제한적이고, 도로도 좁고 골목길도 많다. 그런 곳에서 살던 나에게는, 신입사원 연수를 받으러 머물게 된 일산의 모습이 마치 외국처럼 느껴졌다. 잘 정돈된 주거단지, 곳곳에 마련된 공원, 넓은 도로, 무엇보다 탁 트인 시야가 맘에 들었다. 일산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산이 하나뿐이라서 일산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리고, 연수 과정을 통해 나는 일산연수원의 환경에도 매료되었다. 산 자락에 숲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잔디 운동장이 있고, 3층 높이로 아담하게 지어진 건물, 조용하면서 활기차고, 근무하는 직원들도 다 멋있게 보였다. 나도 근무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왠지 일이 적성에도 맞는 것 같고.
처음 발령받은 부산 사상지점에서 1998년 1년을 근무하고, 그해 11월 결혼을 하고, 1999년 초에 꿈에 그리던 일산연수원으로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렇게 일산으로 와 집을 구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았다.(아이들의 고향은 일산이 되었다.) 삶은 나 같은 형편의 사람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애와 고뇌와 슬픔의 기억이 일산이라는 이름과 함께 얼룩져 있고, 거기에는 바보 같은 젊은 내가 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청춘과 열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내 그것의 많은 부분은 일산에 있다.
주말에 중학생 아들과 단둘이 시험공부를 한 적도 있고, 가족들과 축구를 하고 눈사람을 만들고 모형항공기를 날리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그러나 슬픈 건 애향심이 없다는 것이다. 내게 무미 덤덤한 그곳, 일산. 내 삶은 어디서 오고 어디서 살다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그 어디를 확정하는 것이 이리 어렵다는 것이 정상일까? 모르는 것 투성이인 위태로운 오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