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말미에 편성된 '역자후기'에 '비록 완역은 아니지만...' 이런 문장이 나오면 부끄러워진다. 나는 교과서를 통독하지 않고 참고서의 요약만 훑은 학생이 된다. 독서에 깻잎 한 장 같은 얄팍함만 있고 깊이가 없다. 그래도 꿎꿎하게 '레미제라블'을 다 읽었다. 무려 '한권으로 읽는 레미제라블'813페이지를. 완역본은 은퇴 후 읽겠다.
Queen's theatre가 있는 런던 Wardour street의 담벼락. 집이 여기라면 그럼 코제트는 불어 쓰는 영국인?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 한번쯤은 '레미제라블' 공연을 봤을 것이다. 뮤지컬은 좋아하는데 아직 못 봤다면, 뮤지컬을 싫어해서 아직 못 봤대도 꼭 한번 보시기를 권한다. 다만 시차가 많이 나는 나라에서 보실 때는 바늘이나 성냥개비를 준비하시라. 허벅지를 찌르거나 눈꺼풀을 성냥개비로 받쳐야 버퍼링 없이 관람이 가능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2012년 개봉한 '레미제라블'을 기억할 것이다. 영화는 요약하면 이렇다. 울버린은 글래디에이터에게 쫓기고, 캣우먼은 미혼모가 되어 벨라트릭스와 보랏을 찾아간다. 결국엔 캣우먼의 아이를 울버린이 키우고 그 아이는 커서 소피가 되어 동물을 좋아하는 영국 마법사와 결혼한다. 맘마미아! 여기까지 버퍼링 없이 이해했다면 당신은 나처럼 영화를 좀 좋아하는 사람이다. (휴 잭맨과 앤 해서웨이의 SAG Awards 코멘트를 각색했다.)
'Les Misérables'은 프랑스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 오죽했으면 그들은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에서 '짐승'으로 불린다. 그들은 서로 때리고 맞고, 쫓고 쫓기고, 죽이고 죽고, 속고 속인다. 모두 연못 속에 빠져 허우적댄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서.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200년전 지구 반대편 땅에서 살았던 '레미제라블'과 묘하게 닮아있다.
나는 전도연이 좋다. 자신을 연필처럼 깍아가며 연기하는 배우다. 나도 그렇다.
나는 그들에게서 두 가지 공통점을 느낀다. 첫 째, 아무도 강한 의지와 노력으로 인생을 더 불쌍하게, 더 악날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의지로 태어나 처해진 환경 속에서 불운으로 샤워를 하며 불행해진다. 둘 째,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의식주다. 다른 말로 입을 옷과, 먹을 빵과, 쉴 집이다. 일확천금으로 팔자를 고칠 생각을 하지만 현실에서 일확천금은 팔자가 고쳐질 때까지 남아 있지 못하고 증발해버리기 일쑤다.
그러면 그들은 도대체 왜 저러고 있는 것인가? 빅토르 위고도 1830년 경 또는 그가 책을 완성한 1860년 경, 그가 살았던 유럽의 사회상을 보면서 그런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1832년 파리 봉기를 주도하는 젊은이들의 입을 통해 그는 왕정과 공화정, 계급과 계층, 혁명과 반란과 폭동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장발장, 팡틴느, 코제트, 마리우스를 중심으로 얽혀 돌아가는 인간 거미줄을 통해 불쌍한 사람들의 실태를 보여준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 Singing a song of angry men? It is the music of a people who will not be slaves again.' 뮤지컬에 나오는 유명한 노래의 첫머리다. 사람들은 노예로 또는 노예처럼 사는 것에 화가 나있다. 한국땅에서도 예외없이 이런 일은 일어났다. 조정래의 '유형의 땅'에서 지주와 소작인으로 대비되는 두 계층은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 업치락뒤치락 거린다. 소위 '세상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서로 괄시하고 핍박하고, 거기서 싹튼 증오는 피의 복수를 부른다.
'관객들은 여전히 티켓을 구하려고 투쟁하고 있다.'
영화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에는 인간과 유인원이라는 두 계층이 등장한다. 금메달리스트 인간은 자기들끼리 싸우다 종말을 맞아 한단계 내려오고, 동메달리스트 유인원은 인간의 책임감 없는 과학에 의해 한단계 올라간다. 둘은 이제 같은 은메달 시상대에 올라있다. 시상대는 예견된 것처럼 둘에게는 좁다. 동급이 된 둘은 대등하게 싸운다. 정말 인간은 계속 싸우기만 한다. 심지어 뮤지컬 표를 사려고도 서로 싸운다. (상기 사진 참조)
유인원이 인간과 동급일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능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챔팬지 '시저'가 우한바이러스연구소 같은 기관에서 개발하고 있던, 뇌세포 증폭 바이러스를 유인원들에게 퍼트린다. 지능이 급속도로 높아진 유인원들은 결국 인간을 노예로 삼아버린다.
그 결과가 찰턴 헤스턴 주연의 1969년 '혹성탈출'이다. 인간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열어버린 판도라의 상자가 초래한 비극이다. 대신 모두가 유인원의 노예로서 평등해지자 비로서 인류 안에서는 싸움이 멈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지배계층 유인원과 자신들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함을 의식조차 하지 못 한다.
지배계층은 피지배계층이 생존해서 계속 노동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만 보상을 해주고, 그들의 노동을 통해 창출된 부를 대부분 가져간다. 이것이 노예제도라는 것인데 노예들은 본인들의 불평등한 처지를 의식하고 비판하는 것이 금지된다. 지배계층은 노예들이 선을 넘어 부와 지위를 빼앗으러 오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그런 의식이 생기지 않도록 혹독하게 대하고, 배움과 의식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글은 그런 방해를 뚫고 탄생했다는 점이 훌륭하다.
이것은 노예제도의 예로, 고도화된 자유민주주의 기반의 자본주의에서는 이런 비인간적인 양상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다만 마지막으로 남는 한가지 의문점은, 그런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레미제라블은 왜 아직도 저렇게 세상의 그늘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세상에 빵은 많다. 얼마간 안 팔리면 그냥 버려질 만큼 많다. 장발장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는 빵을 훔친다. 노동자의 '최저시급보장'이란 말은 있지만, 아직 자본가의 '최고수익제한'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어느 한 쪽이 너무 많은 것을 독식해 버리면 그어진 선은 항상 불안하다. 조마조마한 포만감이다.
1832년 6월, 바리케이트라는 선 위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은 공화국이라는 정치적 이상을 쫓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공화국이 되었을 때 레미제라블이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인간다운 삶이 더 상위의 목표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인류애에 뿌리를 둔 공정한 분배가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렇다. 싸우면 결국 모두가 다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