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멧별 Jul 11. 2020

열등감에게 빈틈을 보이지 말자

누군가 빈틈을 노리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 키가 작다는 생각을 거의 안 하고 살았다. 생각만 안 했다는 것이지 키 작은 것을 모른다는 말은 아니다. 누가 "왜 그 키 좀 작으시고 안경 쓰신 분" 같은 표현을 써도 괜한 자격지심에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배구나 농구 또는 이성의 환심을 사는 이 아닌 다음에야 키가 결정적지는 않다고 생각다. 그런 것들이야 안 하면 그만이니까.


또 평생 나를 곤란하게 해온 것이 '심폐지구력'이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올라갈 때 체력장을 치른다. 나는 그때 내가 그 능력이 우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00미터 달리기에 항상 자신이 없었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그와 관련한 힘든 시점들이 있었다. 대학입시 체력장, 군대 구보와 행군, 신입사원 연수 중 3종 경기(마라톤, 산악 트레킹, 싸이클링), 회사 등산 행사 등등. 이런 것들은 안 해도 그만이지 않았다.  


안 해도 그만인 것들은 안 해가며, 안 해도 그만이지 않은 것들은 이를 악물고 해 나가며 이때까지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운도 따랐고 이를 악물어도 치아와 잇몸이 잘 버텨줬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느꼈던 점은 우리 사회는 안 해도 그만인 것들을 안 하게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체조건이라는 말이 있듯이 키나 얼굴 같은 것은 말 그대로 '조건'이다. 전제되어 있는 어떤 것이고 쉽게 바꿀 수 없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전제된 악조건을 과대 인지한다. 그래서 조건을 바꾸려고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다. 목숨을 걸기도 한다. 병이 난 것도 아닌데 전신마취에 몸을 맡기는 것 자체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라 본다. 때론 조건을 강하게 부정하기도 한다.


큰 틀에서 자신의 조건을 바꾸려는 시도를 통틀어 '노력'이라 부른다. 자신의 조건에 집착하는 것은 열등감에서 비롯된다. 열등감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타인의 조건과 자신의 그것을 비교하는 데서 생성된다. 인간 행동의 모든 동기가 질투라는 주장이 힘을 받는 대목이다. 사회는 노력을 부추긴다. 앞서 말했듯 노력은 돈과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노력을 도와주며(또는 그런 척하며) 돈을 받는다. 또 누구는 노력하는 시간을 공짜로 이용한다.

이것은 마치 복싱과 같아 보인다. 노력을 통해 기량을 쌓은 복서 둘이 링 위에 오른다. 그들은 조건이 그리 좋지 않은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조건 향상을 기대하는 그들은 서로 때리고 맞는다. 경기가 끝나고 쓰러진 한 명은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한 명은 자신의 조건이 개선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의 개선이 일어나는 곳은 링 위에 섰던 그들의 조건이 아니라 그들을 링 위에 올린 사람들의 재정상태다.

※ 요즘은 여러 가지 제도개선으로 운동선수들의 재정상태도 함께 개선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물론 극소수의 경우에 한정된다. 


인간 능력의 가짓수가 딱 100개라고 가정하자. 평균적인 사람들은 50개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 수도 제일 많을 것이다. 양 극단으로는 불의의 사고로 자가호흡 능력 한 가지만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타고난 조건 또는 엄청난 노력으로 100가지 능력을 다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형태로 정규분포에 가까운 세상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확률통계의 이야기다. 양극단이 비정상적으로 뚱뚱해진 상황은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회적 기대치는 모든 사람이 100가지 능력을 가지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 오히려 실제는 능력이 재력으로 구매 가능하게 되어 있어 100가지 능력을 가진 극소수 외에 대부분이 평균 이하로 쏠려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런 쏠림은 능력 구매를 위한 재력이 없거나 이미 시장의 능력 모두 팔려버렸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러할 때 능력이 많은 자가 능력이 적은 사람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세상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적어도 사람들이 노력으로 능력을 가질 기회는 줘야 하지 않을까? 그 기회조차 선점 또는 선구매해버리는 것을 사다리 걷어차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능력의 가짓수'를 '아파트'로 대체해도 설명이 된다. 인구 절반은 수도권에 살고, 서울 인구는 천만이다. 무주택 대 유주택 가구 비중은 반반이다. 대한민국 인구는 오천만이다. 우리는 어디쯤 있을까?


다시 키와 심폐지구력으로 돌아와서, 안타깝게도 세상은 사람의 조건을 이미 차별과 혐오의 잣대로 널리 활용하고 있다. 언급한 복싱의 메커니즘도 그대로 수용되고 있다. 우리는 그런 환경에서 언제든 마음에 비수가 꽂힐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세상이 그러해도 우리는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단 한 가지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누군가 열등감을 부추기고, 누군가 조건을 바꾸는데 돈과 시간을 쓰게 만들고, 누군가 차별하고 혐오한다고 해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들은 우리가 '난 가진 게 없어, 할 줄 아는 게 없어'라고 스스로 말하게 만든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 심지어 자가호흡 능력도 얼마나 소중한가.  


열등감에게 빈틈을 보이지 말자. 작아 보일 수 있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일단 하자. 남을 보고 나를 보지 말고 나를 먼저 보자. 누군가 그 빈틈을 노리고 있다. 열등감에 젖어 있을 때 당신의 귀에 달콤한 속삼임을 할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당신이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지 말자. 이유 없이 당신을 사랑해 주고 위로해 주는 곳에 가지 말자.  할 수 있는, 하고 있는, 해야 하는 일을 하는 당신 이미 충분히 대단한 사람이다.


작가의 이전글 서대문자연사박물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