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산 시내에 있는 공립 중학교를 나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집에 일이 생겨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 가정환경에 변화가 많았다. 전엔 안 이랬는데 지금 이렇게 돼버린 것들은 어색하기 마련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 같은 어색함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엄청 헐렁한 옷이나 엄청 큰 구두를 걸치고 거리를 걷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고 흉보는 것 같은 열등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성장기의 그런 경험은 세상에 대한 분노가 되기도 한다. 분노는 폭력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염세로 내면화되기도 한다. 그때 나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상급 학교로의 진학은 두려움 반 설렘 반이다. 학교는 최고 학년에게 근거 없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주입해왔다. 해가 바뀌어서 나이를 먹고 학년이 올라가는 순리 같은 일에 긍지와 의무가 생길 이유가 있을까? 그것을 증명하듯 초등학교 최고 학년은 중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철부지 막냇동생이 된다. 어제까지만 해도 어른스러운 맏형이었는데. 나 역시 소위 스포츠머리로 삭발을 하고 딱딱한 교정에 들어섰을 때 많이 무서웠다. 어수선한 집안 사정으로 위축된 상태라 더욱 벌판에 홀로 선 느낌이었다.
그런 나에게 그분들이 강림하셨다. 그분들은 20대의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성이었으며, 직업은 중등교사였다. 그분들을 영접하고 나의 분노와 공포와 고독은 한순간에 날아갔다. 나도 그분들을 따랐지만 그분들도 나를 각별하게 대해주셨다. 이 부분은 주관적 과대망상이 일부 작용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 나는 그 또래의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했으며 그분들은 그것을 코 푼 휴지처럼 구겨버리지 않으시고 현명하게 대응해 주셨다. '훌륭한 교육자답게' 같은 미사여구를 이럴 때 쓰면 좋겠다. 그렇게 나는 바른 길로 성장할 수 있었다.
SMH 영어 선생님과의 추억
선생님은 이영애를 닮았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 후 영어를 처음 접했다. 어머니께서 사주신 펜촉, 펜대, 잉크, 사선지 공책으로 알파벳을 연습했다. S영어사에서 나온 중학영어 테이프도 들었다. 무려 미국에서 녹음했다고 자랑하는 그 오프닝 음악이 아직 기억난다. 나는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어서 영어공부에 정말 매진했다. 수업시간에 돌아가면서 영어책을 읽었는데 내 발음이 괜찮게 들리셨는지 나를 영어 낭송대회 우리 반 대표로 뽑아 주셨다. 그날부터 나는 'In the summer, the grasshopper played.'로 시작하는 교과서 챕터를 정말 달달 외웠다. 베짱이의 배고픔도 개미의 근면함도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내 관심은 오로지 1등을 하여 선생님께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도 내 열의를 갸륵하게 여기셨는지 하루는 당신께서 일요일 당직 서는 날 학교에 오면 특별히 지도를 해 주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성사된 일요일 낮의 황홀한 교무실 특강은 내 평생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선생님의 발음 지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2등이었다. 좌절감에 마음속에 악마가 싹틀 수도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선생님과의 특별한 추억 때문에 마음속에 한 떨기 장미꽃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었다.
KJM 도덕 선생님과의 추억
선생님은 신현빈을 닮았다. 신현빈은 슬의생의 장겨울 선생이다. 나는 학기초부터 선생님의 특별한 분위기에 반했다. 선생님은 잘 웃지 않았다. 외람되지만 지금 생각하면 약간 반항적이고 시니컬한 느낌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가끔 수업시간에 나에게 좀 엉뚱한 질문을 던지셨다. '넌 이거 어떻게 생각해?' 식의 질문들이었는데 나름 조숙했던 내 입에서 나온 말들이 선생님의 마음에 드셨나 보다. 마음에 드셨다기보다는 어린것이 어른 흉내를 내니 재밌어하셨을 수도 있겠다. 한 날은 노래를 시키셨는데 내가 티아라 보람이 아빠가 부른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를 부르자 '너 사랑이 뭔지는 아니?'라는 미소 띤 질문으로 평을 대신하셨던 기억이 난다. 가끔 숙제 검사 공책에 영어로 격려문을 적어 주셨는데 인상 깊었던 한마디는 'Be independent'였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평생 가슴에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반증이다. 어느 무렵에 대학교 앞에 있는 '어드메'라는 카페를 데려가신 적이 있다. 돈가스를 먹으며 이런저런 말씀들을 해주셨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고마운 일이다. 나를 어린 남동생처럼 여기셔서 응원과 격려를 해주신 것이라 믿고 있다. 졸업식에서 내가 머리 숙여 인사를 하자 '그걸로 되겠어?' 하면서 크게 안아 주셨다. 큰 의지가 되는 뭔가 가득한 기분이었던 것이었다.
PBK 미술 선생님과의 추억
선생님은 파멜라 빌로레시를 닮았다. 누구냐면 오래된 영화 '라스트 콘서트'의 여주인공이다. 나는 미술에 소질이 없다. 어떻게 그 장구한 학창 시절 동안 미술 실기 시험들을 넘겨 왔는지 아찔할 정도다. 미술이 그렇게 싫던 나에게 선생님께서 한줄기 빛처럼 내리셨다. 2학년 때 우리 학교에 부임하셨는데 나는 첫 수업시간에 완전 정신이 나갔었다. 내가 아마 반장이어서 차렷 경례 이런 걸 했었는데 목소리가 떨리고 숨이 막혔던 기억이 난다. 쪽지도 남기고, 사탕이나 음료수 같은 것도 드리고, 수업 후 복도에 따라나가 교무실까지 걸어가면서 대화도 하고, 여하튼 가능한 모든 열정을 태워서 선생님을 좋아했다. 그렇게 2학년이 끝나가고 겨울방학을 하는 날 선생님께서 집으로 초대를 하셨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고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서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날은 눈도 살짝 왔는데 86년 대학가요제에서 이정석이 금상을 받은 '첫눈이 온다구요'가 버스에서 나왔다. 댁에서는 대상에 빛나는 유열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들었다. 직접 요리하신 샐러드와 함박스테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사촌 오빠'라는 사람이 왔다. 나는 선생님과 선생님의 '사촌 오빠'와 선생님의 언니와 함께 느닷없는 화투를 쳤다. 너무 재밌었던 하루였고, 내 마음을 보듬어준 선생님의 고마운 초대였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선생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선생님 옆에는 예의 그 '사촌 오빠'가 서 있었다. 나는 웃었다. 선생님의 너무 귀여운 한방이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그분들은 모두 나의 대학교 선배님이 되신다. 지금 나는 꽤 멀쩡한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선생님들께서 보살펴주신 그 한 때가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여드름쟁이 남학생이 뭐 그렇게 예뻤을까 싶다. 먹구름 아래에서도 웃으며 열심히 살아보려는 한 소년을 보듬어준 미녀 삼총사에게 감사와 존경을 전하고 싶다. 세상 일이 영화 같지는 않아서 다시 뵐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십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도 열다섯 살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변치 않는 사랑을 이 글에 담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