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국토가 길다. 개미는 머리, 가슴, 배로 나누지만, 베트남은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눈다. 각 지역마다 대표도시가 있는데 북부는 하노이, 중부는 다낭, 남부는 호치민(舊사이공)이다. 여기에 북부의 하이퐁, 남부의 껀터를 더하면 5대 직할시가 된다. 출장을 간 곳은 북부와 중부 사이에 있는 지방성 '응에안(Nghe An)'이다.
응에안성은 호치민 주석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왼쪽은 라오스와 접해 있고, 오른쪽은 바다인데, 계속 가면 남중국해(베트남은 동해로 부르는) 하이난다오(해남도)에 닿는다. 베트남에서 가장 큰 지방성이며 성도는 '빈(Vinh)'이다. 하노이에서 뜬 우리 비행기가 약 45분 후에 내린 곳이 바로 '빈국제공항'이다.
전자티켓에 터보프롭(TURBOPROP)이라고 기재되어 있어 난 프롭은 프로펠러의 줄임말이겠군, 터보가 붙었으니 그냥 프로펠러기보다 더 빠른 모양이군, 프로펠러기는 처음 타보네, 많이 흔들린다던데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같이 가는 베트남 경력 1년차 A팀장이 베트남 직원 B가 프로펠러기가 아니라고 했단다. 그 때 난 3년 전이 떠올랐다.
3년 전 그날, 크라운을 씌운 내 의치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B가 임플란트를 정말 잘 한다며 데려간 곳에서 의치와 뿌리까지 뽑힌 직후 난 B가 임플란트의 정확한 뜻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른 나라'라는 의미는 국민들의 교육과정, 생활환경, 가능경험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외로 만국 공통 상식의 영역은 매우 제한적이다. 외국에서 생활할 때는 그런 차이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B는 정말 성실하고 능력있는 직원이지만, 나는 B가 프로펠러기를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게이트를 통과하니 버스를 타러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평소 흰바지에 옥색 아오자이 유니폼을 입은 지상요원이 안내를 하는데 그날은 비가 와서 우의를 입고 있었다. 우의 아래로 재밌는 장면이 보였는데 아오자이 앞뒷자락을 동여매고 있는 것이다. 한복도 바쁘게 걷거나 일을 할 때는 치맛단을 끌어당겨 날렵한 모습을 만드는데 아오자이도 뺑덕어멈 치마같이 저렇게 응용이 가능하구나 싶어 사진을 한장 찍었다.
버스가 도착한 곳에는 흰색과 푸른색 창연한 프로펠러기가 위풍도 당당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터보프롭 엔진의 쌍발 6엽 프로펠러 비행기였다. ATR72라는 마크가 보였고 크기는 당당한 위풍과는 달리 아주 아담했으며 뒷문이 열리면서 펼쳐지는 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다. 역시 B는 프로펠러기의 뜻을 몰랐던 것이다.
적이 당황한 A와 달리 베트남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황당 시츄에이션에 익숙한 나는 유유히, 마치 여러번 타 본 사람처럼 비행기에 올랐다. 72인승 거의 만석. 베트남도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로 국내선 항공이 거의 마비되었다가 다시 풀린 시점이라 오가는 사람이 꽤 있었다. 생각보다 소음은 없었고 오히려 장점은 비행고도가 비교적 낮아 아래가 잘 보인다는 점이었다. 착륙 때 많이 흔들리는 것은 다소 아찔했다.
우리 애들 클 때는 'Why?'라는 만화책이 있었는데, 우리 클 때는 '신비 시리즈'가 있었다. 책제목이 각각 식물의 신비, 지구의 신비, 과학의 신비 등등이었다. 내가 정말 여러번 읽었던 대목 중 하나가 바로 '비행기' 편이었다. 과학적으로는 중력을 이기는 양력과, 항력을 이기는 추력이 있으면 비행기는 뜬다. 비행기 날개의 단면이 에어포일(위 볼록, 아래 평평)인 이유는 볼록면을 지나는 공기압을 평평면을 지나는 공기압보다 약하게 만들어 위로 뜨는 힘, 즉 양력을 만들기 위함이다. 공기가 날개를 지나가게 하려면 기체가 앞으로 쎄게 나아가야 하는데, 내연엔진 또는 제트엔진으로 뒷공기를 밀어내면 그 추력이 생긴다.
세계 최초로 이 원리를 이용해 비행기를 만들어 띄운 사람들은 '라이트 형제'이며, 그들이 만든 비행기는 '라이트 플라이어'다. 여기까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알게 된 내용이고, 이후 보라매, 솔개 등의 새이름을 한 고무동력기, 모형글라이더로 꿈을 키웠으며, 파일럿이 되겠다고도 생각했고, 커서 '돈을 벌면' 엄청 비싼 무선조정 모형항공기를 사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랬다. 모형글라이더로 자랑스런 공군참모총장상을 받은 사람은 내 동생이었고, 파일럿이 된 사람은 내 중학교 친구였으며, 무선조정 모형항공기 가격의 몇 배를 월급으로 받지만 아직 사지 못 했다. 이루지 못 하는 것에 대한 수긍력, 이루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자제력, 우선적으로 이루어야 할 것에 대한 집중력 등이 어른이 된다는 것인가 보다.
출장 간 회사 생산라인에서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을 봤다. 손가락에는 반지가, 손톱엔 네일아트가,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꿈많은 손으로 그들은 쉴틈없이 기계조립을 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 우리 이모의 예쁜 손도 몇 십 년 전에 한국땅에서 저렇게 바삐 움직였으리라.
'레미제라블'에서 팡틴은 장발장이 경영하는 모조 유리구슬 공장으로부터 쫓겨나면서 불행이 가속화된다. 전체 중에 하나일 뿐이지만 하나에게는 전부일 수 있는 일들이 세상에 많다. 저들의 노동도 소중하게 지켜졌으면 좋겠다. 출장길 비행기 안에서 어릴 적 만화에 나왔던 라이트 형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에게 '라이트 플라이어 1호'는 무엇일까? 이륙은 한 것일까?
<위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1. 빈국제공항에 내린 ATR72 항공기 2. 그 앞에 선 나 3. 공장 작업 전경 4. 베트남항공 유니폼(우천시) 5. 베트남항공 유니폼(평상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