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멧별 Aug 12. 2020

사자평에서

16 남녀 표류기

비바람에 두들겨 맞으며 표지판은 여기가 '사자평'이라고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다. 그들은 두 시간 전 내원암에서 라디오를 통해 지금 상황이 재밌는 듯 들떠있는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에 따르면 그 때는 1995년 7월 23일 일요일 오전 11시이고 비바람의 정체는 ‘페이’라는 이름의 태풍이었다. B는 참 예쁜 이름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별 헤는 밤'에서 윤동주가 어린 시절 함께 놀았다던 소학교 여자 아이들의 이름과 비슷하단 생각도 했다.


P는 태국이나 베트남쯤 되는 나라에서 등록한 이름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페이’하고 부르면 검고 긴 머리의 여인이 얼굴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눈망울을 반짝이면서,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로 대답하며 돌아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절을 한번 둘러볼 때까지는 그들 대부분이 정말로 비 오는 산을 오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원암 툇마루에 잠시 쉬었을 때, 그 산중에서 난데없는 선키스트 오렌지를 내주시던 스님의 내려가란 말을 들었어야 했다. 라디오 방송도 산에 오르라는 응원과 격려가 아닌 만류로 해석했어야 했다.


태풍의 영향권에 든 고원 평지는 상상 밖의 모습으로 그들을 맞이하고 있다. 땅을 기어 다니는 바람과 달리 산 위를 날아 다니는 바람은 채 화가 풀리지 않은 음악 선생 같은 기세로 그들을 체벌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들어 친숙했던 이 산과 계곡 이름은 심리적으로 만만했다. 그렇게 그들은 대체로 아직 세상이 만만했다. 그러나, 생각은 많았지만 깊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은 많았지만 넓은 세상에 비해 알고 있는 것들 적었다.


"그날은 아버지의 장례식이었어. 남겨진 스무 살 쌍둥이 자매만 빈소를 지키고 있었지. 밤 열 한시쯤 어떤 남자가 조문을 왔어. 그 남자는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정말 키 크고 잘 생긴 남자였어. 두 자매는 상중이었지만 절을 하고 있는 그 남자에게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어. 그만큼 그 남자는 매력적이었던 거지."


A가 하는 이야기를 몇몇이 둘러앉아 듣고 있었다. 대단한 내용이 아닌 걸 알지만 그날은 다들 그런 것에도 서로 귀를 기울였다. 방 안에는 열여섯 명의 91학번 남녀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MT를 왔다. MT라는 이름 아래 모인 건 그들이 대학시절 같은 동아리였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밀양, 재산에 자리 잡은 표충사 계곡 근처 민박집을 잡았다. 그들은 저녁을 먹고 둘러앉아 술자리를 펼치고 있었다. 몇 년 전이었다면 웃고 떠들고 난리였을 타이밍인데 이제 그렇게 들뜰 일은 없어 보였다.


그들은 5년 전에 처음 만났다. 까까머리 남고생과 단발머리 여고생으로 만난 그들은 졸업을 앞둔 예비 대학생이었다. 4년이 훌쩍 지나갔다. 여자들은 고등학교 졸업을 실감하기도 전에 대학을 졸업해야 했다. 남자들은 군대를 가고, 휴학을 하고 복학하면서 2, 3 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이번 MT의 시작은 누군가 던진 한마디였다.

"4년 동안 같이 동아리 친구로 지냈는데 졸업하고 나니 연락도 없고 이게 뭐냐. 심심한데 MT나 가자. 애들 다 모아봐라."

술 취한 날 방에 벗어 놓은 옷가지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친구들을 주섬주섬 모아 날을 잡고 민박을 잡고 한 것은 학교 다닐 때부터 동아리에 애착이 많았던 C였다.


사자평은 넓디넓다. 맑은 하늘 아래 이런 풍광을 맞이했다면 감탄해 마지않을 일이지만 태풍이 쓰다듬고 있는 산 정상 평원에 서 있다는 것은 개탄스런 상황이다. 전혀 등산에 어울리지 않는 평상복과 평상화 차림의 그들은 이제야 왜 여기를 올라왔는지 궁금해진 눈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듯하다. 게다가 몇몇은 어제의 과음으로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아침도 라면 국물 몇 모금을 마신 게 전부라 소화기 내장들은 폭동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건 군인정신 때문이다. 어젯밤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가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는 산불처럼 돌아다니다 결국 군대 이야기에 이르렀다. 먼저 현역으로 다녀온 H와 K가 가루 항생제, 바늘, 실만 있으면 도끼에 찍힌 상처도 꿰맬 수 있다는 야전병원 봉합수술과 강원도 산골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추위에 대한 무용담을 침을 튀겨가며 늘어놓았다. 유난히 18개월 단기사병 출신이 많았던 터라 여자 G와 N이 똥방위라는 비속어를 사용하자 해당자들집단 반발하기 시작다. 방위 출신 A, D, I가 누가 들어도 의심이 가는 유격, 산악행군, 헬기레펠, 혹한기 훈련, 박격포 사격 등의 복무 경험을 늘어놓았다. 급기야 '팔도 사나이' 합창과 함께 내일 산 정상을 탈환한다는 결정으로 마무리되었다.


6명의 여자들은 익숙한 객기와 유치함에 별반응이 없었다. 뻔한 그 한심함이 재밌기도 했다. 으레 또래 남녀간 정신적 성숙도의 격차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이다. 말은 안 했지만 '니들이 그러다 말겠지' 식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마시고 떠들다 새벽이 되어서야 남녀 각각 방으로 가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고 라면을 대충 먹고 출발해서 약 세 시간 뒤, 그들은 지금 사자평에 와 있다.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는 이제 두 자매만 살게 되었어. 둘은 서로 의지하며 사이좋게 지냈어. 주변 사람들도 자매간에 저렇게 잘 사니 다행이라고 했어. 그런데 어느 날 언니가 악몽을 꿔. 자기가 동생을 목졸라 죽이는 꿈이야. 꿈을 깨고도 죄책감에 어쩔 줄을 몰라했어. 언니는 자기 맘이 편해지려고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해. 근데 동생이 갑자기 사색이 되는 거야. 같은 날 밤 동생도 언니를 죽이는 꿈을 꿨다는 거지."


중간중간 A가 목소리를 높였다 줄였다 할 때마다 평소 잘 놀라는 M은 비명을 질렀다. 몇 년 전과 분위기는 달라졌지만 그렇게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 왜 그런 꿈을 꿨는데?"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 G가 선수를 치고 물었다.

"둘이 겉으로는 친한데 속으로는 서로 미워하는 거 아닌가?" 조용하던 N이 제일 먼저 말했다.

"남자 때문 아닌가? 장례식 때 본 잘생긴 남자." L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다른 답을 냈다.


옆에서는 네 명의 남자들이 포커를 치고 있었다. 가끔 E 집에 모였던 멤버들이 그날도 포커를 쳤다. 오늘은 K가 좀 따는 듯했고, H는 초반에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반쯤 눈이 감겨 있었다. 항상 진지한 J는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카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I는 문 옆에 자리를 잡고 기타를 쳤다. 한때 동아리  작은 트리오를 만들어 노래를 부르던 O와 F가 오랜만에 화음을 맞췄다. D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듣고 있었다. 기타가 박자에 맞춰 나가지를 못 하고 자꾸 코드를 틀려서 노래도 덩달아 끊어졌다. 그래도 다 같이 자주 부르던 노래라 몇몇은 멀리 앉아서도 따라 불렀다. 그렇게 다들 나름의 방식으로 MT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비바람이 너무 세차게 몰아치는 통에 사방을 구분할 수 없다. 고립된 그들은 당황스럽고 무서워진다. 그나마 비를 좀 피할만한 큰 바위 아래를 파고든 그들은 두 패로 나눠진다. 왔던 길로 도로 내려가자는 쪽과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가자는 쪽이 서로 맞붙는다. 회군파는 이미 온 길이니까 길 잃어버릴 염려 없이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다는 논리다. 진군파는 올라온 길이 가팔라 내려가기가 어렵고 이정표를 보건대 올라온 거리와 내려갈 거리가 같다는 논리다.


사자평에 표류된 16인의 남녀는 정답이 있을 리 없는 양자 간 선택을 두고 사자평에 서있다. 어젯밤 취직이니 결혼이니 하는 인생의 선택과 도전에 대한 얘기에서도 정답을 찾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영남알프스의 중앙 지점에 비바람을 맞고 서서 그들은 또 역시 고민하고 있다. 조난에 가까운 상황에서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으며 어느 방향이든 움직여야 한다.


진군파의 D가 말한다. "이러나저러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야. 다들 춥고 배고프고 힘들고 두렵고, 다 똑같은 상황이야.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다 죽을 수도 있어. 여기 표지에 얼음골 방향으로 3.5km라고 쓰여있잖아. 온만큼만 가면 돼. 평지를 거쳐 내려가는 길이라 괜찮을 거야. 다 같이 가니까 괜찮아. 지금 선택해야 돼."


"비슷해. 그 남자 때문인 건 맞아. 그런데 자매는 그 남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남자에 대해서 서로 말도 안 해 봤어." 뭔가 답을 말하려고 다들 멈칫멈칫하는 사이 A가 설명을 이어갔다.

"이유는 바로, 둘 모두 또 한 번의 장례식을 원했기 때문이야. 아버지 장례식에 왔다면 집안 장례식에 또 올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래서 자매를 죽여서 장례를 한번 더 치르고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길 무의식 중에 갈망했던 거지. 그 욕망이 꿈에 나타난 거야."  


"근데 이거 옛날에 Q선배가 했던 얘기 같은데." C가 말했다. A는 "그런가?"하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큰 없는 이야기의 결말에 분위기는 시큰둥해졌다. 그렇게 이야기 판도, 노래판도, 노름판도, 술판도 다 그저그랬다. 그들은 분명 함께 있어서 좋은 느낌을 가졌지만 그 느낌이 예전같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은 거기서 또 다른 세상을 보고 왔다. 전국 각지에서 온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의 민낯을 고 온 그들의 마음은 그 전과 달라져 있었다. 여자들은 졸업에 즈음하여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에 담근 첫발에 계곡물 같은 서늘함을 느끼고 있었다. 들이 2학년 쯤 개봉되어 호기심 어리게 봤던 영화 제목만큼이나 세상은 '달콤 쌉싸름'했다.


"그래 가자." "다 같이 뭉쳐서 가는데 무슨 걱정이야." 다들 용기가 생겼는지 진군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다시 길을 나선다. 강한 바람에 흙과 작은 돌이 날려 다니는지 팔, 다리가 따끔거린다. 눈도 크게 뜨지 못하고 가늘게 겨우 전방만 보고 걷는다.


그런 와중에도 서로 챙기는 말을 주고받으며 어렵게 어렵게 앞으로 나간다. 한참을 걷고 나니 얼음골이 2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나온다. 힘들게 걸어온 시간에 비하면 겨우 1.5km 밖에 못 왔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평원을 지나 조금 낮은 지역으로 내려오니 바람과 비의 험하기가 많이 줄었다. 그들은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나간다. 드디어 계곡에서 볼 수 있는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잡은 것이다.


거기에 예상 못 한 복병이 그들을 또 기다린다. 바로 얼음골의 추위다. 7월이면 한여름이건만 얼음골을 따라 내려오는 그들을 냉기가 엄습한다. 비바람에 온 몸이 녹초가 된 그들에게 난데없는 추위는 엄청난 체력손실을 가져온다. 이가 딱딱 부딪히고 입술이 파래진다. 몇년 전 한참 읽었던 소서 주인공이 해부학교실을 왜 여기서 열는지 그들은 몸 하고 있다.


"잘 모르겠어." 아마도 전날 밤 술자리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일 것이다. 미래의 계획을 물어보는 질문은 마치 방학 때 뭐 할 건지 물어보는 것 처럼 쉽게 오고 갔다. 거기에 대부분은 안갯속의 등대를 보듯 방향은 가지고 있었지만 정확한 좌표를 알고 있지는 못 했다. 질문과 모르겠다는 대답이 오갈수록 분위기는 더 무거워져 갔다.


미끄러운 계곡 바위들을 타고 내려와 그들은 드디어 얼음골 입구에 다다른다. 태풍의 영향으로 대부분 가게들은 문을 닫았고 버스정류장 옆에 가게 하나가 문을 열었다. 그들이 내려올 줄 알았는지 인적 없는 날인데도 아주머니는 옥수수를 삶고 있다. 시외버스에 오른 그들은 안도하며 옥수수를 나눠 먹는다.


시외버스를 타고 오며 라디오를 통해 그들이 산을 헤매던 시각에 '씨프린스호'가 좌초된 소식을 듣는다. 암초에 부딪힌 배가 여수 앞바다에 몇천 톤의 기름을 유출시켰다는 것이다. 선원 19명은 그들처럼 생했고 1명은 안타깝게도 실종되었다. 이 모든 것이 태풍 페이가 저지른 일이다.


우리는 눈 깜짝할 새 그때 우리 또래 젊은이들의 부모가 되어버렸다. 우리 몇은 부부가 되었다. 우리는 살면서 태풍 페이 같은 일들을 계속 겪었다. 그리고 그 날을 생각했다. 우리는 삶을 위해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풍의 언덕, 사자평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허구로 그들이 걸었던 약 10Km에 달하는 경로다.]
To DAMAT : A(KTD) B(PMJ) C(CEJ) D(BHJ) E(KMS) F(KJY) G(NJH) H(SJH) I(JKW) J(LSH) K(LWR) L(LSJ) M(LEK) N(KYS, KNY) O(KHS) P(KJB) Q(OSH) and our friend LSD
이전 07화 서리 내린 안개의 도시, 달랏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