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근무하며 혼자 여행을 하게 된 것은 다음의 이유였다. 아내와 아들 둘은 학기가 끝나고 대학 입시를 위해 한국에 갔다. 그 유명한 동네에 방 한 칸을 얻어 그 유명한 학원들 중 하나를 다니는 것인데 그 유명한 입시 코디네이션은 가격이 천정부지다. 여기에 대한 개인적 '편견'을 몇 자 적으려다 그만둔다. 방학이 끝나면 하노이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한국에 가 보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마땅치 않았다. 더 간단히 말해서 안 그래도 돈이 많이 드는데 나까지 한국에 가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뜻이었다.
회사에서 정한 휴가는 다 써야겠기에 2019년 7월이 다 가는 즈음 나는 3박 4일 일정에 휴가비 30만 원을 책정했다. 그리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달랏을 가보기로 결정했다. 대략 항공료 10, 숙박료 10, 식대 등 10 이런 계산이었는데 결과는 8:6:16으로 났다. 휴가 계획을 묻는 이들에게 이런 계획을 말하면 '격에 맞게' 또는 '체면이 있지(순화시키기 전 표현은 가오가 있지 였다.)' 등등의 말이 돌아왔다. 나는 그런 것들이 원래도 필요 없는데 혼자 가니까 더욱 필요 없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11년 된 모자를 쓰고, 9년 된 바람막이를 걸치고, 8년 된 배낭을 메고, 5년 된 청바지와 3년 된 티셔츠를 입고, 그 날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새것인 들뜬 마음을 가슴에 품고 공항으로 향했다. 배낭 속에는 소설책 두 권, 여행안내책 한 권, 색연필 한 통, 노트 한 권, 옷가지를 넣고서 문자 그대로 가볍게 출발했다.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약 2시간 뒤 럼동성 리엔크엉 공항에 착륙했다. 꽃의 도시로 불리는 달랏인 만큼 공항 이름도 연꽃 연에 생강 강, 연강(蓮姜, Liên Khương)이었다. 공항에 착륙하기 전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면 노란 꽃 하나를 볼 수 있는데 바로 리엔크엉 공항의 지붕이 그것이다. 당장 궁금한 사람은 인터넷 위성사진을 찾아보면 되겠다.
그 노란 꽃 지붕은 김유정 소설에 나오는 동백꽃 같다. 공항 이름에 들어간 생강의 꽃, 즉 산동백의 색깔이 노란색이기 때문이다. 동백꽃 하면 요즘은 공블리가 먼저 떠오른다. 선운사 주지스님이 빨간 동백꽃숲을 걷다가 지나는 중생들이 하는 드라마 얘기를 엿듣게 된다면 아마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속세의 학교에서 배운 기억으로 '동백꽃'과 '메밀꽃'은 각각 다른 얘기인데 '필 무렵'이 그 걸 묘하게 엮어서 자연스러우니 말이다.
달랏(Đà Lạt)의 어원을 찾으면 일반적으로 라틴어 'Dat Aliis Laetitiam Aliis Temperiem'의 첫 글자 들을 따서 D.A.L.A.T.이라 지었다고 나온다. '어떤 이에게는 즐거움을, 어떤 이에게는 신선함을'이란 뜻이라는데 약간 작위적이다. 특히, 나는 '신선함' 부분이 좀 난데없이 느껴진다. 내 추측은 이렇다. Temperiem은 영어 단어 Temperature(기온)과 맥을 같이 할 것이고, 이것이 고랭지의 기온을 말한다면 '신선함'이 아니라 '선선함'에 더 가깝지 않느냐는 것이다. 번역가 또는 네티즌이 낸 오타가 수정되지 않고 위키피디아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 본다.
도시가 아름답고 유니크한 만큼 나타내는 말들도 정말 다양한데 꽃, 자연, 사랑, 연인, 젊음 등 맑은 느낌이 주요 소재가 된다. 그러나, 조금 다른 느낌도 있는데 바로 '안개'이다. 관광표지판에 보면 서리와 안개라는 한자를 담은 베트남어 Sương Mù(霜霧)를 써서 Thành Phố Sương Mù(안개의 도시)라고 자기 고장을 부르고 있다. 실제 아침 안개와 산안개가 많이 끼는 도시이다. 그냥 '구경'을 하러 온 사람과 직접 '삶'을 살아내는 사람의 시각에는 이런 맑음과 흐림 만큼의 거리가 있나 보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1.럼빈 광장의 두 상징 2. 3. 쑤언흐엉 호수 풍경 4. 청수(Thanh Thủy)식당
숙소에서 걸어서 여러 명소들을 갈 수 있었는데 그 중심에 쑤언흐엉호수(Hồ Xuân Hương)가 있었다. 우리나라 남원 광한루 연못에 그 이름을 붙여주면 딱 좋겠다. 한자로 '춘향호'이기 때문이다. 그 호수 언저리에 럼빈광장이 있는데 달랏에 많이 나는 아띠소(Atiso)와 야생해바라기(Dã Qùy) 꽃 모양으로 건물을 지어 놨다. 그 광장에서 출발하여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쉬다가 가다가 천천히 걸어서 돌았는데 멈춰서는 곳마다 카메라를 켜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실바람도 불어와 내 맘은 부풀었다. 나뭇잎은 푸르고, 호수 물도 푸르고, 아름다운 그곳에 내가 있고, 너는 없었다.
달랏에 오면 랑비앙 산을 반드시 가봐야 하는데 달랏 시장에서 버스를 타고 산아래 주차장을 찾아가니 여러 대의 지프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휘파람으로 한대 불러서 '얼마면 되겠니?'하고 흥정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매표소로 먼저 가야 했다. 줄을 섰다가 차례가 되어 여권을 제시하고, 몇 명이 왔는지를 등록하고, 돈을 지불했다. 그런 후 주변을 얼쩡대고 있으니 다른 쪽 창구에서 6명씩 모아서 이름을 불렀다. 지프차가 6인승인 것이다.
나는 빈즈엉성에서 온 띠엔씨 가족과 동승하게 되었는데 그는 매표소에서부터 외국인임이 완전 티나는 나를 도와주었다. 열 살 난 딸 번 아잉은 나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왔는데 '어디서 영어를 배웠냐?', '베트남에는 뭐 하러 왔냐?' 등을 물었고 나는 검찰 포토라인에 선 사람들의 말처럼, 조사에 성실히 임했다.
지프를 덜컹거리며 올라간 랑비앙 산에는 짙은 안개만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실망스러운 맘으로 셀카를 한 장 찍고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와하는 함성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가려졌던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면서, 자동으로 감겨 올라가는 블라인드처럼 안개가 휘리릭 걷혔다. 그 뒤에 나타난 풍경은 한참을 아무 말없이 바라만 보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다시 셀카를 찍었다. 좀 더 밝은 표정으로.
산을 내려와 띠엔씨 가족과 작별을 하려는데 다음에 어디를 가냐고 물어왔다. 시내에 있는 호텔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하자 차로 태워주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결국 그렇게 하게 되었다. 역시 딸과 한참을 얘기했고 아빠는 흐뭇하고 자랑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기념품을 하나 주고 싶었지만 가진 게 없어서 한국어, 영어, 베트남어로 된 내 명함 한 장을 줬다. 번 아잉은 지금도 영어를 너무 잘하니까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해서 꿈을 이루라고 말해줬다. 아빠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말했다. 아빠들은 서로 통하는 것이다.
내가 찍고 그린 달랏역. 그릴 때 오른쪽 공간 부족으로 다소 추상화됨. 돈 주고 팔 생각이 없으므로 수준에 대한 죄책감은 없음.
난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지역 출신으로 평소 예쁘다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그러나 달랏역은 너무 예뻤다. 가지고 간 색연필로 그려보고 싶을 정도로. 막연한 생각으로 가져간 것인데 기념이 될 만한 그림을 하나 가질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뻤다. 고풍스러운 기차에 몸을 실어 창 밖 평화로운 풍경을 보면서 몇십 분을 갔다. 고랭지 농업을 위한 비닐하우스가 대부분인 풍경이었지만 그것이 평화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도착한 짜이맛이란 곳에 린프억사원이 있었다. 입구에는 한자로 영복사(靈福寺)라고 적혀 있었다. 유리와 도자기 조각을 붙인 형형색색의 구조물들이 즐비해 있었다. 조각들이 탱화의 기본색을 띠고 있기에 자연스레 불교예술임이 전해 왔다. 하지만 얼핏 성당의 타일 모자이크나 스테인드글라스 성화와 색구성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사람들은 연방 머리를 조아리며 복을 빌고 있었다. Simon & Garfunkel이 Sound of silence에서 노래하듯 결국 그들은 그들이 만든 인공의 신 앞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는 것은 아닌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 달랏역의 증기기관차 2. 달랏대학교 앞 카페 3. 린프억사원 4. 죽림서원 가는 케이블카에서
숙소에서 택시를 타고 10분 정도 올라가니 케이블카 역이 나왔다. 죽림서원(Thiền viện Trúc Lâm)과 폭포를 방문할 수 있는 산을 오르는 것인데 사람이 없어서 혼자 한 대를 독차지하고 올라갔다. 좋은 날씨에 시원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한 공기를 느끼며 달랏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하늘에 떠 있다 보니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날씨가 좋다고 무조건 모여서 골프를 쳐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정도가 머물렀다 날아갔다.
혼자 떠난 여행이 처음은 아니었다. 어깨에 내린 짐들이 참 무거웠던 시절 나는 '소금'이라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나와 주인공을 비교하며 강한 잔상을 남기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가슴에 지펴진 뭔가를 끄기 위해 나는 하루 휴가를 내고 2박 3일의 나홀로 여행을 떠났다. 소설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 강경 옥녀봉과 젓갈시장, 서천 죽산리 염전, 장항제련소, 군산항 등을 둘러보고 왔다. 주인공이 살림을 차렸던 옥녀봉 빈집을 찾을 때는 SNS로 소설가가 직접 길을 알려주는 호사도 누렸다. 혹시나 하고 질문했는데 정말 답이 왔다.
박범신 소설가의 도움으로 찾아간 소설 '소금'에 등장하는 강경 옥녀봉 빈집. 앞에 쪼그린 내가 쓴 모자는 달랏도 함께 다녀왔다.
두 번의 경험상 혼자 떠나면 일단 말을 안 해도 된다. 직업상 말을 많이 하다 보면 때론 말을 안 하고 싶어 질 때도 생긴다. 물론 내 맘대로 할 수 없고, 해야 할 때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거기에 잠시 쉼표를 찍고 싶다면 나홀로 여행처럼 고립되면 된다. 가만히 있어도 호구(糊口)가 된다면 직업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겠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 대부분은 호구의 수단으로 고육(苦肉)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고육의 첫 단계가 말이라고 생각한다. 갑과 을이 있다면 침묵은 갑의 권리요, 웅변은 을의 의무다. 그래서 을 된 자는 그 의무를 잠시 내려놓을 침묵의 휴식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침묵의 휴식을 강제당했다. 호랑이는 도망가고 곰은 웅녀가 되었듯이, 사람마다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습도 천차만별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나름 수칙을 지키며 하노이에서 나홀로 여행을 한다는 느낌으로 보냈다. 이번 거리두기가 모두의 마음에 쉼표 하나를 찍어주고 갔다면 그것은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희망과 함께 다시 일어나면 좋겠다. 그때는 나홀로 말고 다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