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가는 경부선 철도를 타고 있다. 앞에 앉은 아저씨는 집에서 싸온 김밥을 먹고 있다. 김밥은 종로나 천국에 가야 먹는 걸로 아는 시대에 플라스틱 반찬통에 가지런히 담긴 저 김밥이 무슨 특산품처럼 느껴진다.
창밖으로 개나리, 목련, 벚꽃이 펼쳐지고 진달래는 언제 피나 문득 내게 물어 본다. 중학교 때 뜻밖에 아버지께서 사다 주신 김소월의 진달래꽃 시집이 생각난다. 산천에 흐드러진 분홍꽃이 표지였던 그 책. 아버지는 아들의 어떤 점을 보고 다른 책도 아닌 시집을 사 주셨을까? 곧 만날 아버지께 직접 물어 봐야지.
영동역에 정차한다. 어느 산에 MT 갈 때 였지 하고 또 물어본다. 먼저 간 친구 한 명이 떠오른다. 영동역에서 기차 갈아타면서 가방을 두고 내렸던 녀석. 젊은 그 때 비현실적으로 다가온 그의 요절에 나는 제대로 슬퍼했나 하는 후회를 한다.보고 싶다. 그 녀석이. 그 때 그 친구들이.
덕유산, 가야산, 주왕산. 우리는 그런 아득한 이름들로 쌀과 김치, 소주와 라면을 싸들고 놀러 다녔다. 민박집에서 밤새 웃고 떠들고 산에 올랐다. 이제는 다 서울에 돈벌러 올라간 친구들을 서울에 돌아가면 꼭 만나야지. 그 때 함께 기차타고 놀러가던 여자사람친구였던 아내는 나와 함께 오십을 기다리고 있다. 누구나 다 그런 날이 있다. 원래 아저씨 아줌마로 태어난 건 아니라는 뜻이다. '너희 젊음이 노력해서 성취한 게 아니 듯, 내 늙음도 잘못의 형벌로 받은 게 아니다.' 비슷한 소설 구절도 있지 않나. 너무 서로 젊음을 자랑하고 늙음을 비난하지 말자.
구미에 도착했다. 뒷좌석의 노부부가 오랜 침묵을 깨고 부스럭거리더니 싸온 도시락을 먹기 시작한다. 부인이 소풍 온 것 같다고 하자 남편이 맞장구를 쳐준다. 동생네 장남, 둘째 며느리, 시골 삼촌이 줄줄이 등장하는 대화에서 많은 부분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 내는 데 쓰인다.
대각선 파란 눈 커플은 국적 모를 외국어로 얘기를 나눈다. 뭔 말인지는 몰라도 여자의 애교있는 말꼬리에 남자는 좋아한다. 웃는 여잔 다 예쁘다. 서울 인근 도시에 친인척의 병문안을 갔다가 나와서 잠깐 걷는데 그 도시의 청소년들이 보였다. 키크고 잘생긴 아들들, 밝고 예쁜 딸들. 관여할 수도 없는 그들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항상 나만 잘 하면 되는 게 세상인 걸 알지만 내 자식 또래의 이들에겐 눈길이 더 간다. 모두의 건투를 빈다.
한 시간 후면 물금역에 도착한다. 정오가 되니 배가 고프다. 건강검진에서 내시경으로 후빈 내장들이 어제 직장 후배들과의 무리한 술자리로 뒤집어진 것 같다. 겁도 없는, 객기 충만한 나를 꾸짖는다. 이 주화입마에 빠진 몸뚱아리를 회복하기 위해 엄마표 미역국, 고등어콩나물장조림, 상추오이겉절이를 먹으며 운기조식해야겠다.
대구역이 다가오니 내릴 채비를 하는 사람들이 대구 사투리로 얘기를 나눈다. 그 와중에 업무 카톡은 계속 오고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풀었다 한다. 삶도 이 완행에 가까운 무궁화호처럼 느긋하면 어떨까? 아마 나는 곧 심심해질 것이다. 안타깝지만 분명하다.
조국의 산천은 삐져나온 머리카락 하나 없이 상투를 틀어올리고 책을 읽는 백면서생의 뒷모습같다. 그 자체로 생산성의 흔적도 찾기 힘든, 말그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 번갈아 꽃이 피고 녹음이 우거지고 단풍이 들고 눈이 내려 장식을 해주지만 그 본질은 단순함과 고요함인 것 같다.
43살에 결혼한 먼 친척 딸의 순산 소식을 끝으로 뒷좌석도 조용하다. 경산역에서 창밖 딸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엄마가 눈에 띈다. 젊은 딸은 낯선 도시의 어떤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을까? 오지랖 넓게 그녀의 성공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