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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별 Apr 26. 2020

I am a must-have item.

나는 Male in Vietnam이다.

하노이에서 호치민으로 출장을 간다. 노이바이 국제공항 출발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평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같은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 시간 넘게 기다린 벤치에서 개구지게 다리를 쭉 뻗고 기지개를 켜는데 문득 세 가지 아이템이 눈에 들어온다. 내 구두와 내 수트와 내 시계. 눈을 지긋이 감고 그들과의 러브스토리를 반추해 본다. 단, 세 가지 제품 브랜드는 연상가능성을 최대화하는 새 단어로 대체했음을 알린다.

먼저, ‘금수강산’ 구두. 6년 전 부지점장으로 승격을 하고 새로운 지점으로 발령받아 갈 때 샀던 거 같다. 할인율 높은 상품권으로 유명한 그 브랜드다. 구두혀를 뒤집어 보니 인도네시아 산이다. 거기서 만들어져 한국에서 팔리고, 지금은 또 그 이웃나라 베트남에서 활동중이다. 안창을 세 번, 굽과 밑창을 두 번씩 갈았다. 그 사이 아이들은 유행에 따라 조뭐시기, 나이뭐시기, 컨뭐시기, 아디뭐시기 같은 이름들의 신발을 홀라당 홀라당 잘도 갈아 치웠다. 보통 그런 류의 신발은 밑창을 갈 수가 없다. 그렇기도 하고 밑창을 갈아야 할 때까지 신지도 않는다.


잦은 수선으로 인해 사람이라면 인조인간에 대비될 수도 있는 저 구두는,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내 발에 신겨진 채 하노이. 호치민, 꽝남, 박닌, 푸토, 뚜엔꽝, 하이퐁의 땅들을 밟아 왔다. 주인을 잘 못 만난 구두도 고생이 많다. 자식들의 꿈이 재벌2세인데 아빠가 노력을 안 하는 점이 문제라는 개그도 있던데, 고가 운동화에 질투를 하는 못 난 아비를 만난 자식들도 고생이 많다. 모두에게 격려와 감사를 보낸다.


그 다음은,  ‘공원부지’ 수트. 공원부지란 단어로 브랜드가 연상될 지 모르겠다. 3년전 한국에 갔을 때 급하게 사 온 기억이 있는데 확실치 않다. 베트남에서 테일러메이드도 해봤지만 옷감이 더운 기후에 비해 너무 두꺼워 만족스럽진 않았다. 역시 내게 제일 좋은 건 일산 덕이동 로데오 거리에 있는 공원부지 아울렛 매장 레디메이드 기성복이다. 아 그리고 수선은 반드시 같은 건물 3층 UFO수선실에서 해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그 주인장은 기능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을 것이다. 저 브랜드의 표준사이즈와 전혀 동떨어진 내 체형에 딱 맞게 바지를 수선해 준다.


합리적인 가격에, 예쁜 색상에, 맘에 들게 착 떨어지는 옷감을 골라 입으면, 내일 당장 큰 실적을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싹튼다. 이제 한국에선 직장인들에게 수트를 강제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만약 걱정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계속 걱정을 하면 아무 문제도 없겠다.’는 역설처럼, 복장이 문제였다면 편한 옷을 매일 입어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는 얘기인데, 그것이 꼭 그렇지만은 않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이다.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 잘 먹냐고 따지면 할 말은 없지만 나는 수트가 좋다.


수트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자켓을 꽉 당겨 긴장을 주면 묘한 책임감과 자신감이 생긴다. 적어도 나는 20여년 직장생활을 그런 텐션을 가지고 살아온 거 같다. 중저가의 이 수트를 입고. 다짐컨대 하바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40대에 페라가모 수트를 입는 사람의 90%가 CEO가 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온다 해도 난 내 오랜 친구 공원부지를 입겠다.


마지막으로 은하수 손목시계. 은하수를 뜻하는 이 영어단어가 엄청 유명해진 스마트폰 이름이 되기 전에는 시계, 양복 등에 두루 쓰였었다. 저 시계는 현재 다니는 직장에서 근속 10주년 기념으로 11년 전에 받은 시계이며, 남성용과 여성용 한 세트이며, 현재 여성용은 저 시계를 받기 10년 전에 내가 일군 가정의 유일한 여성 구성원께서 필요할 때 차신다.


영화 ‘스피드’에서 테러를 벌인 범인은 퇴직한 경찰이다. 본인의 퇴직기념 시계를 폭탄에 장착해 전 직장이었던 경찰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드러낸다. 나는 그런 일 없이 무난히 직장생활을 마쳤으면 한다. 본인이 긴 시간을 바친 일에 대해 그 일이 끝났을 때 좋은 감정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만큼 보람된 일도 없을 것이다. 물론 퇴직 후 너무 남아 있는 것이 없다면 솔직히 화가 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당하게 벌어서 꼭 필요한 곳에 쓰여졌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 그걸로 된 거라 생각한다.

벌써 여러 차례 수리를 해서 퇴직하는 날까지 저 친구가 버텨줄지 모르지만, 고장이 나더라도 내 인생의 박물관에 모셔두고 싶은 나의 가치 있는 애장품이다. 무려 Stainless steel, water resistance, sapphire crystal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아이템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가진 아이템들이야 내다 놓으면 오히려 수거 비용을 더 내야 할 것들이지만, 그런 물질에 담을 수 없는 가치를 추구해왔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 그 외는 맡은 바 열심히 잘 하고, 밥 잘 먹고, 잘 지내면 되는 것이라 본다. 막 호치민에 도착했고 내일은 다시 하노이로 복귀한다. 여기는 베트남이고 나는 브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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