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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별 Aug 04. 2020

사회  보기

입사지원서에 적은 유일한 특기

"어떤 종류의 사회를 잘 보나요?"

서울 본사 인사부 대리님이 복도에 대기 중인 입사지원자에게 한 질문이다. 고향에서 기차를 타고 면접 보러 국립대 졸업반 청년은 씩씩하게 대답한다.


"예! 신입생 OT, 동아리 MT, 결혼식, 피로연 등 각종 행사에서 사회를 잘 봅니다!"

머릿속에서 는 방송국 뉴스에 나오는 앵커의 완벽한 표준말을 구사하고 있었지만, 실제 대리님의 귀에 들어간 언어는 완벽한 고향 사투리였다. 빙그레 웃던 대리님의 얼굴  아직기억다.


23년 전의 일이다. 대리님은 훌륭히 직장생활을 마치시고 은퇴하셨다. 이제  입사동기들이 그 위치를 거쳐 당시 대리님의 직속 상사 위치에서 근무하고 있다. '사회 보기' 특채로 뽑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다행히 입사를 했다. 신입사원 연수 중에도 반장으로 계속 사회를 봤고, 급기야 연수원으로 발령받아 수관리자로 이어서 사회를 보게 된다.


'총무형 인간'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집단에 소속되든 집단의 유지와 운영에 적극 앞장서고 그를 위해 소속원 전부와 소통하는 유형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다소간의 봉사, 희생정신이 필요하고, 배우자로서는 기피 대상이며, 업 목적을 내포하기도 한다.


 생각에 나는 그런 유형이다. 그렇다는 낌새는 다른 사람들에게쉽게 보이나 보다. 자주 그자리에 추천당하고 경선에서도 자주 이긴다. 일단 맡으면 느닷없는 견마지로를 다한다. 앞에 '명'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오래오래 하게 된다. 추켜세워지는 것은 노고에 대한 감사도 있지만, 그 자리가 혹 자에게  넘어올까 저어하는 방어 기일 가능성도 있다.


러다 그 모든 자리에서 한꺼번에 '당연 해촉'되는 일이 생긴다. 유급직이었다면 서울에 아파트 한 채 살 수 있었을 각종 회장, 총무직을 그만두게 만든 사건은 다름 아닌 '해외 발령'이었다. 간 봉사할 수 있어서 영광스럽고 보람찼으며 모든 구성원이 적어도 내 이름 석 자는 기억 사실이 나에게는 큰 보상이라면서 하노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노이에 온 지 6년이 되어 간다. 각종 자리의 굴레를 벗고 도착한 하노이에서 난 또 뭔가를 맡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사회를 보고 있다. 나라를 옮겼을 뿐 결국은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이 정도면 운명이라 할 수 있겠다. 거부할 수가 없다. 내 생애 이토록 아름다운 날이 또다시 올 수 있을까 싶다.

베트남에서 프로 MC로 활약 중인 안서형 아나운서와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행사는 조직의 품격이다. 내가 자주 쓰는 말이다. 참석자 모두가 집중할 수 있고 기억에 남을 수 있다면 성공적인 행사다. 그를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구성요소 별로 차례를 잘 짜야하고, 막간을 부드럽게 이을 대책도 있어야 한다. 돌발변수도 최대한 예측해 놔야 한다.


나는 연예인도 아니고 방송국 MC도 아니기 때문에 임기응변으로 쓸 개인기나 말주변이 부족하다. 가능한 건 오로지 준비와 연습뿐이다. 30초 스피치도 갑자기 닥치면 버벅대기 마련이다. 준비된 사회가 품격 있는 행사를 만든다. 가끔 인간관계 감성이 풍부하신 분들이 좀 과장되게 사회 잘 보는 비결을 나에게 물어보시는데, 답은 '열심히 준비한다' 외에는 없는 것 같다. 그건 아마 유재석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모자라는 부분을 잘 알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메꾸어 나가는 것이 평범한 나의 생존방식이라 생각한다. 사회 코멘트에 가끔 등장하는 '동남아 순회공연'을 이렇게 '동남아 주재근무'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가수에게 쏟아지는 갈채처럼, 나도 언젠가 박수받으며 돌아갈 수 있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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