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메이드 대리 인생] 5
탈 때부터 시뻘건 얼굴을 하고 옆에 붙어선 남자의 가방을 받아 줬다. 퀭한 눈길로 감사의 인사를 전함과 동시에 그의 코로부터 홍탁의 그것과 비슷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순간 앉아 있는 내 앞으로 토악질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해가 구름으로부터 머리를 내밀자 일순간 어둡던 버스 안이 환해졌다. 잠을 청하던 몇몇은 안구를 공격하는 햇빛이 부담스러운 듯 몸을 뒤척였다. 이어 동쪽 방향에 앉은 사람들은 거기에 매달린 뒤 한 번도 세탁을 하지 않은 듯 한 커튼들을 착착 여미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저 자리에 앉고 매일 아침 태양광선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잠들기 전 미리 커튼을 쳐 놓는 치밀함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부산함에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짐짓 철저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직장의 강박이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잔소리로 튀어나온 것 같아 반성했다.
앞에는 옥색 시폰 스커트를 차려입은 여자가 방금이라도 쓰러질 듯 봉에 힘겹게 매달려 있었다. ‘수요일이라. 비라도 내리면 빨간 장미를 선물 받고 멋진 데이트를 하겠지.’하고 생각했다. 선녀의 날개옷 같은 그 옷은 꽉 찬 96색 크레파스 세트 같은 버스와 참 어울리지 않았다. 스커트를 통과해 들어간 햇빛은 여자의 다리에 부딪혀 다시 밖으로 튕겨 나왔다. 매끈한 젊은 여자의 허벅지 실루엣이 드러났다. 한동안 숨죽인 채 보고 있다가 몸 아래쪽이 긴장되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눈길을 돌렸다. 다시 돌아보고 싶은 악마의 속삭임을 참았다. 그랬다가 다리의 소유자가 눈치라도 챈다면 ‘뭐 어쩔 건데. 이 변태야.’라는 텔레파시가 전해올 것 같았다. 나는 침을 삼켰다. ‘고의로 훔쳐본 게 아니에요.’하는 변명을 혼자 늘어놓고 혼자 후회하고 혼자 반성했다.
유난히 어깨가 넓은 옆 사람에 밀려 몸의 3분의 1이 팔걸이 밖으로 밀려 나와 있다. 받아 놓은 가방이 미끄러지지 않기를, 앞에 선 여자의 다리를 건드리지 않기를, 담배 때문에 오염된 기관지가 간헐적인 기침을 쏟아내어 다른 이의 잠을 깨우지 않기를, 유치원 때부터 십 수년간 배웠던 공중도덕이 제대로 지켜지기를, 그 비좁은 공간에서 조차 기원하며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나는 서울로, 서울로 실려 가고 있었다. 앞유리에 걸린 디지털시계는 빨간 LED 작대기를 조합해서 7시 13분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어 두 개의 작대기에 불이 꺼지고 다른 한 개가 켜지면서 7시 14분이 되었다.
성산대교 위를 꼭 오르고픈 차들은 빨간 후미등으로 뒤차를 유혹하며 대박 냉면집의 줄처럼 늘어서 있었다. ‘아, 이 대로면 지각인데.’하는 긴장감에 오금이 저렸다. 겨우 도착한 당산역에서 9호선을 타고 국회의사당역을 지나 여의도역에 내렸다. 개찰구를 빠져나가는데도, 역을 빠져나가는데도 긴 줄을 서야 했다. 손목시계로 8시 5분 전임을 확인하고 사무실에 발을 디뎠다. 참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긴장되는 85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