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메이드 대리 인생] 9
술잔을 주고받는 빠른 손들에서 괘종시계의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거래처 김 대리가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부장님. 그거 아십니까? 애들 크면서 먹이는 우유가 달라진다는 거. 안 들어보셨으면 제가 말씀드릴까요?”
“들어보고 재미없으면 너 폭탄 한잔이야. 해봐.”
“요즘 엄마들이 애가 태어나면 먼저 아인슈타인 우유를 먹인답니다. 애가 천재 되라고.”
김 대리의 과장된 표정이 대학교 연극동아리 신입생의 햄릿 연기 같다.
“그리고 유치원에 들어가면 서울대 가라고 서울우유를 먹인답니다. 그런데 가만히 키우다 보면 그게 아니니까 초등학교 가면 이제 연세우유를 먹이고, 중학교 들어가면 건대우유, 고등학교 가면 지방대라도 가라고 저지방 우유를 먹인다더라고요. 큭큭큭.”
아주 짧은 정적이 흘렀다. 김 대리를 보호하려는 우리 쪽 김 과장이 박장대소를 시작했고 웃음은 급속히 전염되어 연극이 잘 끝나는 듯했다. 문제는 권 팀장의 발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잠깐만. 우리 박 대리가 지방대 출신이지? 어디라고 했지?”
“예? 아, ㅇㅇ대학교입니다.”
거래처 세 명의 반응이 다양했다. 학부장, 길 차장, 김 대리 순으로 ‘잘 알고 있지, 좀 후진 학교네, 어디?’ 정도의 반응이었다. 툭 튀어나온 얘기에 거래처 황 부장이 진화에 나섰다.
“예전에 똑똑한 애들 많이 들어갔고, 지금도 사회지도층에 많이 깔려 있지. 요즘 신입들 가끔 들어오잖아? 장 계장인가 걔도 거기 아냐?”
“장 계장은 ㅁㅁ대입니다.” 길차장의 빠른 정보제공이었다.
“그런가? 다 비슷비슷해서. 허허허. 그래도 우리 박 대리께서 능력을 인정받아 취직도 하고 서울에서 근무도 하고 출세지 출세. 허허.”
도저히 이 시점은 감사의 인사를 전할 타이밍은 아니란 생각을 하면서도 입은 벌써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말로서 해소되지 않은 분노는 행동으로 해소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만고의 진리인 자작 금지 조항도 어겼다. 눈치 빠른 김 과장이 옆구리를 툭 쳤다. ‘왜 이래? 이제 시작인데.’라는 메시지가 그의 팔꿈치로부터 전해져 왔다. 나는 소극적인 분노 표출마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