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메이드 대리 인생] 10
일정은 계속되었다. 잘 짜인 한 편의 프러포즈 이벤트처럼 자연스럽게 자리는 차수를 더했다. 아홉 개의 브라운관이 칼질을 한 시루떡처럼 벽에 붙어 있는 노래방에서 여섯 명은 열두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여섯 명이서도 서로 잘만 주거니 받거니 하던 술들을 이제는 손이 없어지기라도 한 듯 남의 손에 의존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원래 있던 여섯이나 나중에 온 여섯이나 참 모두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통성명 한 번으로 바로 남매의 연을 맺고 결코 남매 사이에서는 오갈 것 같지 않은 대화를 끝도 없이 이어갔다. 참 단란한 모습이다. 이 자리에 화산재와 용암이 들이닥친다면 천년 뒤에 우리는 ‘21세기 동양의 폼페이’라는 전시회에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경제 활동조차 향락으로 물들어 있었다.’라는 해설과 함께.
양주로 통칭되는 술이 들어왔다. 양주는 쓴 맛과 탄산 외에 크게 내세울 게 없는 국산 맥주에 말려서 폐기되고 있었다. 초등학생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스카치위스키는 양조과정에서 독특한 향을 내기 위해 쏟아부었던 노력을 자랑하는 레이블의 깨알 같은 설명을 무색하게 만들면서 그렇게 폐기되고 있었다.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유리병에 향이 나가지 않게 마개를 잘 닫아 진열되어 있었을 것이다. 손님이 오실 때마다 한 모금을 꼴깍 마실 만큼만 소모되는 귀함을 누렸을 것이다. 양주는 특별한 자리를 빛내주는 소품이다.
대통령이 끝까지 잡수셨다고 해서 유행해진 시바스 리갈, 큰돈을 꿈꾸며 먼 대양으로 떠났던 외항선원들이 귀국할 때 던힐 양담배와 함께 자랑스럽게 밀수했던 죠니워커, 12년 정도의 숙성에 만족하던 사람들은 흔해 빠져서 생겨버린 시시함을 18년 정도의 숙성기간인 발렌타인, 로양살루트로 달래더니, 급기야 30년에 가까운 고급을 찾게 되고, 또 시시함을 느끼자 클렌피딕, 더 글랜리벳, 맥켈란 같은 싱글몰트 위스키에 유행을 맞추기 시작했다. 포도주라는 단어가 와인이라는 외래어로 대체된 후론 가본 적도 없는 ‘샤또’라는 곳에서 길러진 메를로니 까베르네 소비뇽이니 하는 포도 품종들을 외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막걸리에 와인을 말아서 색깔이 고우니 어쩌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술자리라는 곳은 쉴 새 없이 이런 소재들이 필요할 만큼 재미가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아마 모르는 사람이나마 불러 누이로 삼고 말동무나 하자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고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