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무시당하다.
[레디메이드 대리 인생] 11
“집은 어딘가?”
거래처 길 차장이었다.
이 질문은 서울에 발령을 받고 나서 그 전의 인생을 통튼 것보다 더 많이 받은 질문이었다.
“운정신도시입니다.”
“아 그럼, 교하?”
“아닙니다. 일산신도시에서 좀 더 가깝습니다.”
권 팀장의 타이밍이 다시 빛났다.
“일산도 신도시, 운정도 신도시, 교하도 신도시, 다 아다라시네? 하하하.”
이번에는 열두 명이 한꺼번에 웃는다. 웃음소리가 더욱 맹렬하다.
“아, 예. 허허...”
“신도시 살면 좋지. 새집이고. 그래도 그 나이에 아파트도 한 채 있고 성공했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길 차장은 집요했다.
“그런데 거긴 북한이 워낙 가까워서, 서울로 들어 와야지?”
“아직. 이제 이사 간지 1년도 안 되었습니다. 차장님께서는 댁이 어디십니까?”
“나? 나는 뭐 반포에 허름한 아파트 하나 있지. 구도시지 구도시. 하하하.”
‘허름한’ 이란 단어가 애써 겸손을 곁들이려한 그의 최소한의 인간됨이었다.
무림의 고수들이 허허벌판에서 마주치면 먼저 어느 검파 소속인지 밝히듯이 서울 지역의 사람들은 사는 곳을 물으며 생활수준을 가늠하는 습성이 있었다. 집에 대한 대화는 항상 같은 패턴 거기까지였다. 내가 조금 덧붙이면 ‘대단하시네요. 재건축이 곧 된다고 하던데‘ 정도였다. 권 팀장은 황부장의 집이 대치동이라고 했다. 그리고 좋은 안주를 그냥 지나칠 사람이 아니었다.
“길차장님. 북한 문제없습니다. 거긴 너무 가까워서 북한이 미사일 쏘면 머리 위로 지나가기 때문에 안전하답니다. 하하하. 우리 박 대리가 아침에 출근시간이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려서 고생이 많습니다. 열심히 사는 친굽니다.”
여자들 중 일부가 한 시간 반이 주는 묵직함에 나직이 탄성을 내뱉었다. 난데없는 치하에 나는 또 감사의 인사를 했다.
해부학교실에서 포르말린 냄새를 풍기며 누운 커데버가 된 기분이었다. 열한 명의 수련의는 개복 후 간과 쓸개가 없음을 알고 놀란 눈으로 선생을 쳐다 본다. 선생은 무테안경 뒤로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한 눈빛을 쏜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한다. ‘영업을 심하게 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다른 조도 다들 여기로 모여 봐. 희귀한 케이스인데 운이 좋군. 간과 담낭이 지속적인 자존심 손상에 영향을 받아 복강 내 이웃한 다른 장기에 흡수되었을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많이 불편했을 텐데 오래 사셨군. 그 와중에 시신까지 기증해 주신 고인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도록. 3조는 일단 다른 커데버를 수배해 보도록 하자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열 명의 오누이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하는 일들을 성실히 해내고 있었다.
명목상 내 누이인 여자만이 오라비의 마음을 눈치 채고 조용히 담배만 태우고 있었다. 미로 같은 지하 술집이 교활한 당나귀 등의 젖은 솜처럼 늘어진 박 대리를 토해낸 건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였다. 집에 가고 싶었다. 거래처 사람들을 모두 태워 보내고 나서야 팀장은 일찍 귀가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권 팀장과 김 과장은 같은 방향이었고 같은 학교 출신이었다. 아마도 집 근처에서 한자리 더 판을 벌이려는 생각일 것이다. 택시를 홀라당 타더니 강남의 어디로 떠나 버렸다. 내일 보자는 묘한 뉘앙스의 인사를 남겼다. 내일 본다는 말은 개인적 감정을 앞세운 죄, 술이 너무 많이 취한 죄, 딸랑이 역할을 제대로 못 한 죄 등을 두고 보자는 말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