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를 준비하다.

[레디메이드 대리 인생] 12

by 멧별

라디에이터 캡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증기는 곧 램프의 요정으로 변할 것 같다. 나에게 세 가지 소원을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장소와 시간에 왜 나는 평정심을 잃고 망가져 버렸나?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뭔가? 출근을 해야 하는데. 세 가지 소원을 만들어 본다. ‘차를 고쳐 주고, 와이프는 내가 집에 일찍 귀가한 걸로 알게 기억을 심어주고, 늦지 않게 출근을 시켜줘.’ 만들고 난 후 정말 내가 멍청하다는 생각을 한다. ‘돈 100억을 주고, 서울말을 완벽하게 쓰는 서울대를 나온 서울 사람으로 세탁해 주고. 강남에 고급 아파트를 줘. 아니 100억이 있으면 고급 아파트는 사면되는데. 아까운 소원 하나를 버렸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 거기에 앉은 채로 내릴 생각도, 어딘지 알아볼 생각도, 도움을 청해볼 생각 하지 않고 있었다. 퍼즐이 모두 맞춰졌다. 예수의 얼굴을 찾았다.


눈길을 돌렸을 때 사람들이 포장마차에 모여 있었다. 우동 가락을 후루룩 거리며 소주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무엇이 저들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 저 무리 중 제일 우두머리가? 힘겹게 지나간 어제가? 이미 시작되어 버린 내일이? 아니면 술이?’ 나는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과 함께 회사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대리운전을 부르면 얼마가 나올지 생각하고 있었다. 신용카드로 계산이 어렵기 때문에 현금이 얼마 있는지 생각했다. 머릿속에서 춘향이가 그네를 타듯 어질어질 진자운동이 느껴졌지만 돈 문제에 다다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출은 위험이나 체면과 바꿔서라도 줄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발밑에 낙엽처럼 오색으로 밟히고 있는 대리운전 명함을 하나 집어 들었다. 전화를 걸었다. 여의도에서 운정신도시. 3만 원에 배차해 본다고 한다. 심리적인 한계선을 넘어섰다. 택시를 타도 그 정도가 나오는데 내 기름을 쓰면서 내 차로 가는데 3만 원이라니. 다시 다른 낙엽을 주웠다. 이번에도 3만 원이다. 식용유도, 밀가루도, 휘발유도, 대출이자도, 철근도 그게 무엇이든 간에 시장에서 팔리는 모든 것들은 장사치가 두 명 이상이 되면 그들이 가격결정을 위해 머리를 맞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가격은 공정가가 아닐 것이고 실질적인 소비자가 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난 받아들일 수밖에 없구나.’하고 생각하자 마음은 편했다.


그때 누군가 명함을 내밀었다. 한글로 ‘부웅 대리운전’이라 쓰고 ‘부웅’ 밑에 한자로 ‘朋友(붕우)’라고 썼다. 딴에는 친구처럼 친한 대리라는 뜻에 ‘부웅’이란 의성어로 재미를 더할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었지만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 아래 전화번호가 있고 작은 글씨로 책임보험가입, 정숙 운행, 안전귀가 등을 조잡스럽게 적어놓았다. 습관과 취기가 힘을 합쳐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했다.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아 들고 명함지갑을 찾았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아마 명함이 손에 닿는 곳에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에 미안함을 느꼈으리라.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발원지에 초점을 맞추고 고개를 드니 반팔 와이셔츠에 양복바지를 단정히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취조실에서 형사와 마주 앉은 초범처럼 순순히 집의 위치를 진술했으며 기존에 제시받은 3만 원이라는 가격의 불합리성에 대한 나의 의견도 피력했다.

“2만 5천 원에 모시겠습니다.”

“그러시죠.”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나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왜 그렇게 쉽게 대답을 했는지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을 때 알 수 있었다. 긴 파마머리에 깊은 눈, 오뚝한 코, 고뇌에 찬 입술. 예수의 얼굴이었다. 나는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차가 있는 지하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평소에 택시 기사들과는 술에 취한 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잘도 떠들었지만 예수의 얼굴을 한 경건한 대리운전기사에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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