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밭에 파묻혀 있던 감자들이 뽑힌 지 닷새째였다. 그간 이리저리 흔들리며 부딪혔다. 빛이 나고 다시 어두워지고, 또 다시 뒹굴려 포개지고 포개진 그들은 피로함에 대부분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아래쪽에 있는 감자일수록 더 표정이 험악했는데 압력에 짓물러져 싹을 내지도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에 와서는 조용해졌다. 계속해서 몇몇씩 추려지며 사라졌고, 나흘째 조금 흔들리더니 이젠 이전의 수많던 그들은 온데 간데없이 조용히 열댓 개만이 캄캄한 방에 들어앉았기 때문이다. 분명 좁은 감이 있고, 이따금씩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지만 이제껏 시간을 생각하면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피로함에 누구도 소리내지 않고 잠든 하루. 하나 둘, 단잠에서 깨자 감자들은 웅성이기 시작했다.
“여기가 흙 속일까?”
“살결에 꽉 붙지 않아. 흙 속이 아니야.”
“그럼 우린 밖인 거야? 이렇게 캄캄한데?”
“바람이 덜 들이치는 게 밖은 또 아닌 것 같아.”
“비가 올 거야. 비가오면 차츰 흙속으로 들어갈 거고.”
“겨울인 것 같아. 바람이 차.”
“그럼 버텨야 해. 비가 오려면 멀었어.”
감자들은 그 말을 끝으로 서로 더 밀착해 붙었다. 비가 오기 전에 얼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달라붙은 그들은 예전 흙과 같은 포근함은 아니었지만 일부라도 맞붙은 감각에 예전의 포근함을 조금이라도 떠오르게 했다.
“각자 자란다고 한 뿌리에 있더라도 서로 잘 몰랐는데”
“다들 엄청 작았었지?”
“응, 나는 작다고 걱정도 많이 받았어.”
“언제 다들 이렇게 커져버린 거야?”
이제 감자들은 서로를 간질이며 장난치기도 했다. 그러다 찬바람이 쑥 들어오면 화들짝 놀라서 다시 옹그라붙어 틈을 막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들이 어미에게 받았던 양분도 조금씩 말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쪼글쪼글한 살결. 찬바람을 피하려 서로 맞붙어 있던 자리가 짓물러지기도 했다. 점점 말이 없어지는 그들. 그때 비교적 더 탱글한 대왕감자가 주변에 붙은 감자들을 밀치며 말했다.
“저리가! 네들 짓무른 살에 낀 균 옮으면 어쩌려고!”
“우리 추위를 버티려고 서로 붙어있었잖아.”
밀려난 알감자 하나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따뜻한 것도 없구만. 떨어져! 오면 다 차버릴 거야.”
대왕감자는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대왕감자의 반대쪽으로 몰린 다른 감자들. 비좁은 공간에 그들이 몰리자 틈이 벌어졌는지 바람이 좀 더 들어왔다.
“추워… 비올 때까지 버텨서 우리 같이 뿌리내리기로 한 거 아니었어?”
볼멘소리에도 대왕감자는 대꾸도 않고 눈을 감고 자는 체하고 있었다.
“나쁜 놈. 뿌리에서도 지가 제일 먹었을 것이면서.”
밀려난 감자 중 하나가 말하자, 이어 살이 가장 짓물러, 겨우 버티고 있는 감자가 말했다.
“이 좁은 곳에서 하나씩 죽으면서 세균이라도 퍼져봐. 누구도 괜찮을 순 없을 걸.”
그러자 일순 서로를 돌아보는 감자들. 적당한 크기의 감자가 소리쳤다.
“시끄럽고 저리 좀 가! 너 벌써 냄새나는 거 같다고!”
그러더니 대왕감자를 제외한 감자들은 서로를 밀쳤다. 이따금씩 대왕감자가 건들릴 때면 대왕감자가 움직여 닿인 감자를 반대편으로 내팽개쳤다. 감자가 뒹굴어 우루룩, 우루룩 소리가 나더니 감자 크기대로 서로 닿지 않게 자리를 차지했다. 대왕감자와 가까울 수록 아직 살이 단단하고 컸다. 그리고 닿는 감자가 적었다. 반대로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무르고 옹기종기 붙었다. 그래서 박스 한쪽 끝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다른 끝은 엉겨 붙어 금방이라도 무른 살에 즙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쁜 놈들! 대왕감자랑 다를 바 없는 놈들!”
작고 무른 감자 무리에서 하나가 소리쳤다.
“시끄러! 나라고 여기 오고 싶어서 왔어?”
중앙의 적당한 크기의 감자가 소리쳤다.
“그냥 여기 왔으면 어쩔 수 없는 거야. 너가 내 크기였으면 안 이랬겠니?”
다른 적당한 크기의 감자도 맞장구쳤다.
“시끄러! 조용히 좀 해!”
그들이 다툴 동안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대왕감자가 소리쳤다. 일순 조용해진 공간. 대왕감자는 만족스러운 듯 빙긋 웃었다. 그의 머리에는 조그맣게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대왕감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비가 와서 이 면적에 다 심기면, 싹이 큰놈이 사는 거야. 빨리 올라가서 볕과 물을 먹어야지.’
한동안 고요함만이 돌았다. 이전의 장난이나, 과거 흙의 추억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서로를 무시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대왕감자를 가까이서 보는 큰 감자부터 슬그머니 싹을 틔웠고. 어느덧 중앙을 거쳐 작은 알감자 무리까지 그 모습이 한둘 나타났다.
“야, 싹을 틔워? 우리 크기에 싹까지 키우면서 어떻게 버티게?”
“너같이 ‘나는 작아서 안돼’ 생각만 하는 놈들은 절대 안되겠지. 나는 달라. 크기는 작지만 아주 질기거든.”
“하하, 저기 물러 즙 새는 녀석이 먼저 죽을 줄 알았는데 너가 먼저 가겠구나.”
“맘대로 지껄여라. 다- 중간 크기 감자한테 들은 바가 있다.”
“어차피 난 싹도 안 틔울 건데 한번 말해봐.”
그 말을 들은 싹 틔운 작은 감자는 내심 자랑하고 싶었는지 입을 씰룩이며 말했다.
“그래. 여기 같이 오래 있었는데, 너도 고집부리지 말고 듣고 해라 그냥. 큰 감자 쪽에서 들린 이야기인데 날이 따뜻해지고 있대. 지금부터 준비해야 돼.”
“뭐? 조금도 모르겠는데?”
“야 우리같이 엉켜서 버티는 애들이 알겠냐? 혼자 독립적으로 버티고 있는 저분들이 알지.”
“이 좁은 곳이 뭐 얼마나 차이 나는데?”
“아휴, 매사 부정적인 놈. 넌 이제 비 와도 제대로 살지도 못할 놈이다.”
“너가 너무 희망적인 거 아냐?”
“그래 계속 초칠 거면 그만 얘기하자. 죽겠다는 소리를 그냥 하네. 한심한 놈.”
작은 알감자 둘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엿들었는지. 작은 감자 무리에도 억지로 짜내어 싹을 틔우는 감자도 있었다. 그럴 때면 싹이 서로를 간질일 때가 있었는데, 작은 감자무리는 싹을 틔우는 상대를 그래도 대단한 결심이라며 인정할 때도 있었고, 꼴값이라며 무시할 때도 있었다. 어느덧 대왕감자 쪽은 이파리가 자랄 듯 우뚝 싹이 솟아 있었다.
며칠이 또 지났다. 앞다퉈 싹을 틔우고 있는 감자들. 이미 포기하고 죽어가는 작은 감자들. 이미 죽어 즙이 새어 나오는 감자들도 있었다. 비좁은 공간에 죽은 감자의 즙이 바닥을 적셔 천천히 작은 감자무리에서 큰 감자 쪽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퍼지는 세균의 공포. 작은 감자무리에서 머리에 싹을 가장 먼저 틔웠던 감자도 젖어가는 바닥에 서서 간절히 비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싹을 틔우는 것에 영양분을 나눠 사용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싹을 틔운 작은 감자가 연신 되뇌었다.
“진동!!! 진동이다!!”
조용히 싹만 키우던 대왕감자가 큰 소리를 질렀다.
“진동? 무슨 진동이란 거야?”
옆의 큰 감자가 대왕감자에게 물었다.
“흙 속이 기억이 안나? 규칙적인 진동. 비가 오는 거라고!”
공간의 감자들은 일순 소리를 질렀다. 대체로 대왕감자 쪽에서만 소리가 났다. 작은 감자 무리는 대부분이 죽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작은 감자 무리에서 죽은 감자 중에서는 짓물러 균에 감염되어 죽은 감자가 있었고, 애써 싹을 키우다가 영양분이 모자라 죽은 감자도 있었다.
살아있는 감자들은 진동에 집중했다. 점점 다가오는 진동.
“진동이 커! 큰 비가 오나 봐!”
대왕감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고만고만한 감자들을 밀치고 싹을 키운 자신이 대견했다. 이 좁은 곳에서 결국 자신 같이 똑똑하고 강한 씨알이 살아남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큰 감자 놈들은 이유도 모르고 싹 틔우기를 따라만 했지, 이렇게 그대로 들어간다면 흙에 들어간 후 뿌리싸움이 있다는 걸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아끼고 아낀 이 양분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자라 옆에 놈들까지 먹어 치워 이곳을 점령할 테다.
부스럭-
어둠밖에 없었던 공간에 빛이 들이쳤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는 생김새. 그는 놀란 듯이 그들을 바라보더니 대왕감자를 들어올린다.
“와! 여보! 이것 좀 봐. 좀 더 뒀으면 뚫고 올라왔겠는데?”
“아! 감자 샀었지. 까먹었다.”
“이정도면 심어줘야 하는 거 아냐?”
“하하하, 여기 심을 데가 어딨어.”
“다 버려야겠네. 아깝다.”
감자들이 다시 뒹구른다. 하나씩 포개고 포개어진다. 죽은 놈, 산 놈에게서 진물이 터져 나온다. 그럼에도 옹기종기 내세운 푸르른 싹. 그 싹은 노란 봉투에 담겨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