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담금질을 거치는 과정

기회와 두려움 그 사이에

by 구행


아침에 출근 후 메일을 확인하는데, 한 중견기업의 사업담당자로부터 메일이 와 있었다.


"00기업인데, 정부 보조금 지원사업에 선정되었습니다.

보조금 지원을 받기 위해 계약부터 해야 하는데,

나라장터 계약체결에 대해 대행을 문의합니다."


나는 후다닥 어떤 기업인지, 어떤 국가 보조사업에 지원했는지 공고와 이력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검색해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선 기업의 연매출은 1조 이상으로 각종 관련 사업에 대해 언론에서도 언급되는 기업이었다. 그리고 보조사업의 지원금액도 최대 50억 지원으로 꽤 컸다. 일단 문의만 들어온 거니 관련 업무에 대한 절차와 세부 업무 범위, 그에 따른 견적서를 전달했다.


이후로 담당자와 일주일 가까이 몇 차례 메일로 업무 범위나 견적에 대해 세부적으로 이야기했다. 메일을 주고받을 때마다 기업에서 계속 견적에 해당하는 업무범위를 확인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반복되면서 이내 해당 업무에 대한 새로움과 기대감, 한 번 해보겠다는 자신감은 희미해져만 갔다.






기회와 두려움 그 사이


지금까지 스타트업이나 개인사업자 중심으로 의뢰를 받았기 때문에 사실 처음 문의가 들어왔을 때 '이거 잘 해내면 뭐든 되겠다' 싶었다. 사업 규모 자체가 크기 때문에 많이 어렵고, 나라장터 계약을 다른 방법으로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업무가 낯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앞섰다. 다소 힘들고 벅찬 도전과제이지만 이것을 잘 해낸다면 조달행정 분야에서 나만의 브랜딩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검색만 해도 행정사 또는 나라장터 계약 관련해서 수많은 행정사의 글이 존재하는데 나한테 연락했을 때는 이유가 있겠지'

'단순 견적이니 쫄지마. 사전 탐색의 시그널이고, 일단 후보군 안에 들어와 있다는 뜻이야'

'단순 견적이더라도 이 견적을 내기 위해 각종 준비와 실무 구조를 익히고 있어.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중견기업을 클라이언트로 자문하는 일, 초보 행정사가 전문가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좋은 기회였다. 업무에 대한 두려움보다 나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생각이 더 크게 닿았다. '어쩌면 내 능력 밖일지도 몰라'라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하지만 이 기회로 성장하고 싶다'라는 욕망을 강하게 품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오가는 메일 속에서 기업의 사업규모와 계약체결 금액, 보조사업 목적 등 그 사업에 대해 알게 되며 나는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계약 규모가 0000억 원이었는데, 실제 회사를 다닐 때도 접해본 적 없는 계약금액이었기 때문이다. 00억 원까지는 계약을 해봤어도 그에 몇십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사실 그 금액 자체가 가늠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진짜 이걸 맡아서 완수할 수 있을까'라는 무의식적 부담감이 자리를 잡았다. 끝나지 않는 메일에 사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갈수록 악몽도 꾸고 스트레스 지수만 높아져갔다.


더 이상 '할 수 있을까, 없을까' 무의미한 고민에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수록 자기 의심에만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업 관계의 결정권을 다시 내쪽으로 돌려야겠다 생각했다. 내가 조금 더 자기 객관화를 통해 결론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업무르 수임하는 것도 중요하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업을 오래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지켜야 했다.


그리하여 어렵게 관련 업무를 진행하는 선배 행정사님에게 연락을 드렸다. 선배님은 일면식도 없는 내 전화에 성심성의껏 답해주셨다. 알고 보니 해당 기업은 선배에게도 견적 요청을 했고 나와 선배를 후보군으로 두고 계속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선배도 관련 사업 자문위원으로 있지만, 해당 기업의 계약체결 금액은 본인도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라 하셨다. 추후 유사 업무에 대해 좋은 인연으로 협업해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선배와의 짧은 통화였지만 스스로 정리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는 바로 메일을 썼다. 메일의 요지는 고액 계약 및 감사대상 사업으로 전문성과 그 강도가 매우 높은 구조여서 저희 사무소에서 단독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맞다. 나는 결국 기회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마음 한켠에 성공하는 사업가들은 이런 큰 기회일수록 덥석 잡아 진행할 텐데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이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다. 다만, 나만의 속도로 말이다. 이번 건은 실제 요구되는 전문성과 감당 가능한 책임선이 내 경험 그 이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나만의 속도를 지키기 위한 결정을 내렸다.


한 발짝 물러서면서 지금까지 나에게 없었던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나에 대한 질문, 나에 대해 정면으로 마주해 보고 스스로를 평가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상담만으로 해당 업무에 대한 세부적인 구조와 키워드를 알았다. 또한, 관련 분야의 새로운 선배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멈춘 게 아니라, 한 발 물러나 다음 기회를 위한 준비 시간이었다.

이번에 상담만으로 며칠 동안 감정이 힘들었던 경험은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가기 위한 필수적인 담금질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담금질 과정이 편할 수만은 없다. 강한 열기에 지치거나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수 있다. 그럴수록 자기 객관화와 함께 나 자신을 믿는 굳건한 마음이 필요하다. 뜨거운 불을 견뎌낸 쇠만이 무엇이든 벨 수 있는 칼이 되듯이. 이러한 시간을 거치며 나는 다시 한번 성장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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