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속에서 나를 만나다
비 오는 날 오래된 깊은 숲에 가 본 적이 있는가?
비 오는 날 종묘에 가 본 적이 있는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오래된 자연과 장소는
우리를 먼 곳으로 깊은 곳으로 데리고 간다.
제주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비 오는 제주에서 어디로 가야 하나를 생각하다 비자림으로 향했다.
제주에 와서 여러 번 와본 비자림이지만
비 오는 날 비자림에 오기는 처음이었다.
비자림은 곶자왈의 하나라고 한다.
숲을 뜻하는 곶과
덤불을 의미하는 자왈.
곶자왈.
(어떤 해설가는 돌을 의미하는 곶과 숲을 의미하는 자왈이 햡쳐져 '돌 위의 숲'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화산 암석과 덤불, 나무들이 함께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루어진 숲이다.
화산석 위에서 나무와 식물이 자라기 쉽지 않아 오랜 세월을 거쳐야 숲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500년에서 1000년에 이르는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숲을 이룬 천년 숲 비자림에 비가 내린다.
비 오는 비자림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방문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함께 온 처가 어른들 뒤에서 천천히 걷다가 비 내리는 숲 속에서 멈추어서 수백 년의 세월을 지켜온 비자나무를 바라보며 명상과 묵상을 했다.
비 내리는 천년 숲의 비자나무들이 비에 흠뻑 젖으면서도 말을 걸어온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덩굴과 콩짜개, 이끼와 더불어 녹색 옷을 입은 듯한 노목이 신선같이 말을 걸어온다.
수고했다고, 다 괜찮을 거라고, 너무 애쓰지 말라고...
비 내리는 그 천년 숲, 비자림에서 내 안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
[비자림에서, 빗소리 앞에 서다]
천년의 나무 앞에
나는 오늘의 시간으로 섰다.
비는 나무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고
나는 그 흐름을 따라
잠시 멈춰 선다.
가지가 굽은 건
무거워서가 아니라
버티며 살아낸 시간의 흔적이라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비는 말을 하지 않고
나무는 울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
나는 나를 들여다보았다.
무엇을 지켜왔는지,
무엇을 잃어왔는지,
누구를 기다려왔는지를
고요한 이 숲에서 묻는다.
비는 내 어깨 위에 내려앉고
나무는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오늘, 나는
한 사람의 삶도
한 그루의 나무처럼
조용히 오래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 written by 리빙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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