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인다와 보는 만큼 느낀다의 버무림
여행의 의미는 저마다에게 다를 것이다.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 먹는 것에 진심인 사람, 그냥 쉬는 것에 방점을 두는 사람. 무엇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고 각자의 취향과 그때그때마다의 개인 상황에 따라 그 선택은 달라질 것이다.
나에게 여행은 나이에 따라 조금씩은 관심의 포인트가 달라졌던 것 같다.
젊은 시절에는 빠른 시간에 많이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 같고 중년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보는 것보다는 느낄 수 있는 것에, 여행지에 스며들 수 있는 관광이 아닌 그곳에서의 삶을 경험해 보는 여행을 지향했던 것 같다.
어떤 것에 초점을 두는 여행이던 공통적으로 내가 방문하고 체험해 보는 것은 3가지 정도다.
로컬시장, 박물관과 갤러리, 학교와 도서관이다.
로컬시장에서는 그곳의 현재의 삶을, 박물관이나 갤러리에선 그곳의 과거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문화적 역량을, 학교와 도서관에서는 그곳의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30여 년 전 첫 해외출장으로 베트남을 방문하였었다.
시간을 내어 하노이 국립대학을 방문하였고 학교 캠퍼스를 구경하고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대화를 나누는 대학생 주위로 갑자기 수십 명의 대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30년 전 나는 그들의 눈동자에서 베트남의 미래를 보았다.
지난 30년간 베트남의 발전이 어떠하였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치앙마이에 도착한지 4일이 흘렀다. 치앙마이 올드시티에 머물려 책 보고 글 쓰고 거닐고 하며 시간을 보내다 이제 주변이 익숙해지고 방향감각이 어느 정도는 생겼기에 거니는 범위를 조금 넓혀 보기로 했다. 올드시티 내에서 도보로 갈 수 있었지만 미루어 오던 박물관이며 갤러리며 도서관 등 문화와 지혜의 곳간을 가보기로 했다.
치앙마이 문화산책의 첫 번째 코스는 치앙마이 문화센터(Chiang Mai Cultural Center)로 정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신 유홍준 선생님은 그 책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하셨다.
일견 동의하면서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문화나 예술 작품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먼저 어떤 지식이나 정보, 평론 등 외부의 정보 없이, 선입관을 가지지 말고 먼저 나의 눈으로 머리로 마음으로 자유롭게 보자는 것이다.
너무 많은 정보와 해석이 때론 나의 사유와 상상의 날개를 꺾어버려 내가 느끼는 문화 예술이 아닌 누군가의 해석에 잠길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4일 동안 치앙마이 역사, 문화에 대한 정보 서치 없이 발로 거닐며 눈으로 마음으로 치앙마이를 내 스스로 그려보고 있었으니 이제 나만의 사유와 상상의 세계에서 전문가의 해석과 해설의 공간으로 넘어와도 된다고 생각했다.
치앙마이 문화센터의 본관이라고 오해하고 거닐던 별관의 포스터 하나 없이 텅 빈 공간을 보며 마음속으로 700년의 치앙마이 역사를 땅에 묻었는가 하는 욕지기가 올라오는 순간 나의 황당한 모습을 지켜보던 별관의 기념품 가게 사장의 안내로 문화센터 본관으로 들어서는 원 맨 쇼를 하였다.
여러 방에 걸쳐 멀티미디어 영상과 축소모형을 통해 치앙마이 탄생과 발전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4일 치앙마이 올드시티를 발로 걸으며 보았던 성벽과 수로(해자), 4개의 주요 관문(Gate)의 목적과 의미, 그리고 형성 과정을 다양한 정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제 내가 눈과 마음으로 보고 그린 그림 위에 치앙마이 역사와 문화의 정보가 옷 입혀져 치앙마이가 입체적으로 마음과 머릿속에 들어온 것이다.
치앙마이 올드시티의 사각형 구조는 도시계획, 방어 기능 그리고 불교적, 우주적 철학과 세계관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도시 설계의 걸작이라고 설명한다.
지난 며칠 내가 낭만적으로 멜랑꼴리한 느낌을 가지며 거닐었던 수로(해자)와 성벽은 버마(미얀마) 등 외부 세력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낭만과는 거리가 먼 구조물이었고
새벽 시장과 저녁 시장에 들어선 노점상과 맛집들 근처에 둘러선 4개의 성문(Gate)은 저마다의 고유 기능과 목적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머릿속에서 정리된 치앙마이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정보 지도를 가지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치앙마이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규모가 큰 왓체디루앙 사원이었다.
사원에 들어서 우리로 말하면 대웅전이라 할 수 있는 메인 사원 건물로 들어섰다.
거대한 원형기둥이 받치고 있는 사원 내부 안쪽에 건물 내부 지붕에 다다르는 거대하고 화려하다 못해 눈부신 금빛을 내뿜고 있는 부처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유럽 사람들은 경이에 찬 눈으로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순천 선암사의 단청을 덧칠하지 않은 화장기 없는 단아한 모습과 오버랩되며 내겐 경건한 마음보다 눈부신 금빛을 피해 빨리 나오고 싶은 공간으로 느껴졌다.
나의 실망스러운 마음을 부처님이 아시는지 사원 외부에 서있는 왓 체디 루앙(Wat: 사원, Chedi: 불탑 Luang: 거대한)의 그 이름처럼 붉은 석탑은 700년의 오랜 세월의 흔적을 조용히 품은 채 묵묵히 서있었다.
60m의 높이(원래는 90m 높이었다가 지진으로 무너진 후 일부 재건)의 석탑은 이 근처를 산책하다 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석탑이다.
눈부신 금빛의 부처 상보다 이끼 끼고 무너진 석탑의 모습이 부처가 전하고자 했던 무언의 진리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사원을 나서다 사원 앞 길거리 노점상에서 팔고 있는 돼지고기 야채볶음 덮밥이 눈에 들어왔다.
음식은 단 한 가지였다.
그 음식의 이름은 "카우 까파오 무쌉"(매운 다진 돼지고기 바질 덮밥)으로 태국인들의
국민덮밥 요리이다. (우리로 말하면 김치볶음밥 정도라고 해야 할까)
변변한 식탁도 없이 가판대 겸 조리대 옆 테이블에 달랑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고 우걱우걱 맛있게 밥을 먹고 있는 유럽 청년을 보자 참을 수 없었다.
덮밥 하나를 주문하였다. 그 청년이 다 먹기를 옆에 서서 기다렸다.
드디어 나의 차례. 내 옆의 식탁 프라이팬에 다진 고기와 야채와 매운 소스를 넣고 볶은 뒤 무심하게 플라스틱 도시락에 밥을 넣고 덮밥을 내준다. 그 옆의 프라이팬에서 막 조리한 계란부침을 얹어서.
한 숟가락을 입으로 넣은 후 쉬지 않고 숟가락질을 해서 단 5분 만에 그 덮밥을 해치웠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또 있을까. 그것도 착하디착한 45바트(2천 원)의 가격으로.
숙소 옆에서 인스타그램급의 사진 연출이 가능한 멋스럽고 맛스러운 유럽식 브런치를 아침으로 이 음식의 5배가 넘는 가격에 먹었지만 맛과 만족감의 효용도는 단연 길거리 덮밥이 앞선다.
낯선 길거리 음식과의 만남이 기막힌 맛남을 선물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유홍준 선생의 말과 "보는 만큼 맛본 만큼 느끼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의
나의 생각이 적절히 버무려져 낯설었지만 맛 깔라고 독특한 치앙마이를 깊게 느끼게 해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