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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jin Nov 19. 2022

내가 되는 집

내가  중학생, 고등학생일 무렵, 어느 개그맨의 와이프가 화제였다. 하얀 에이프런을 하고 너무나 이쁜 얼굴로 그녀만큼 이쁘고 정갈하게 꾸며진 집을 소개하는 티브이 속 그녀의 집을 보고 있으면 감탄에 감탄을 하곤 했다.   정리정돈을 하는 것도, 청소를 하는 것도, 집안을 가꾸는 것도 그다지 관심이 없는 엄마는 '저건 다 돈이 있으니 가능한 거지, 사람 쓰고, 돈으로 바르면 다 저렇게 되는 거야'라고 했다.  

  이제 나는 그때 티브이 속 그녀의 나이가 되었고, 나는 엄마 말처럼  '돈으로 발라 사람 쓰고 사는 집'에 살고 있진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완벽했던  삶은 잘 포장된 것뿐이었다는 것이 온 천하에 밝혀졌지만, 가정주부가 된 지 15년쯤 된 나는 그녀가 집에 들인 시간과 노력 (비록 그것이 설마 남의 손을 빌린 것이라 할지라도)은 진심을 다해 인정을 한다. 그렇게 집을 정리된 상태로 가꾸고 유지를 한다는 것은 식구들이 생활하며 만들어 내는 온갖 불규칙적인 어지러움을 그때그때 즉각 즉각 정돈하고 치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만큼 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녀가 집에 쏟은 정성은 진짜이지 않았을까? 

  

 나는 집에 있는 것이 좋다.

 현관문을 나서면 나는 온전한 내가 되기가 힘들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5층 사는 한국 여자'이고, 아이 학교일로 학교에 가면 '한국인 엄마'가 되고,  한국 사람들을 만날 때는 '중국 사람이랑 결혼한 한국 여자'로 불린다.  중국인들을 만날 때면  '중국으로 시집온 한국인 여자'가 되고,  영어 쓰는 외국인들을 만날 때면 ' 중국에서 오래 살고 있는 한국사람'이다.  운이 좋게도 나를 온전히 나로 봐주는 친구들이 한 두 명 있긴 하지만, 그 외에 나는 여기서 타인들이 정해주는 역할이 있다. 그렇게 하루를 지내고 내 나라 말이 아닌 외국어를 쓰고, 그들이 정해준 역할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피곤하다.  결혼을 하고 나서 남편에게 통보한 것이 있는데 "나는 절대로 집안에서 중국어를 안 쓰겠다"였다.  "너랑 결혼해서 내 나라가 아닌 곳에 살고 있는데, 굳이 내가 사는 집안에서 중국어를 써야겠니?"가 이유였다. 다행히 남편은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고, 우린 싸울 땐 서로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제 삼의 언어인 영어로 썼다. 그리고  정해진 법칙도 아니고 누가 세워 놓은 법도 아닌데 아직까지 그렇게 살고 있다. (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 강아지 둘은 중국에 살고 있지만 한국말밖에 알아듣지 못하고, 아이도 한국어를 너무나 잘한다)

  어쨌든 이렇게 집에서만은 내 맘대로 하겠다는 통보 같은 것을 하기 시작하면서, 집은 어느새 이 넓은 중국 땅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되었다.  내가 틀고 싶은 음악을 틀고, 내가 쓰고 싶은 말을 쓰고,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하면서, 온전히 내가 될 수 있는 곳, 누가 정해 놓은 역할이 아닌 나로 있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다. 그 대가로 육체적으로 아주 피곤하기는 하다. 나는 매일매일 끝도 없이 청소를 하고, 물건을 정돈하고, 먼지를 털고, 빨래를 하고 그 빨래를 정리한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기분 전환이 필요하면 주기적으로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 보기도 한다. 맘먹고 대청소라도 하는 날이면 집안에서 만보를 걷기도 한다. 나의 인터넷 쇼핑 장바구니에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생활이 되는 모든 가전제품과, 이쁜 식기들, 조명, 소품, 디자이너 가구들이 그득그득 담겨 있다. (물론 나는 티브이 속 그녀처럼 부자가 아니니, 몇 달을 모아 사기도 하고, 생일 선물이나 기념일 선물로 받기도 하고,  장바구니에 고이 모셔 놓기만 하는 것도 많다).  혼자 있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세팅된 깨끗한 집에서 있는 시간이 가장 소중하고도 필요한 시간이다.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되는 느낌이다. 

 

 요즘 가끔 그녀 생각을 한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남들이 정해준 역할을 하던 그녀가 가장 잘하던 일, 그리고 가장 자신을 잘 보여 줄 수 있는 일이 집을 가꾸는 것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내 집이 내가 온전히 내가 되는 곳이라면, 그녀도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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