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이 중 막내는 유일하게 돌잔치를 하지 않았고, 어린 시절을 돌아볼 사진조차 제대로 없다. 남편의 사고와 수술로 아이에게 신경을 쓸 만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어릴 적 기억이 없다고 할 때마다 추억조차 남겨두지 못한 것이 지금도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잘 먹고 잘 잔다는 건 다행이면서도 그만큼 관심을 받지 못했다.
남편은 퇴원을 해서도 병원이 가까운 시댁에서 지내며 통원치료를 했다. 결론적으론 별거 아닌 별거를 하게 된 셈이다.
친정 부모님께서 육아를 도와주셨지만, 퇴근하면 인근 집으로 가시니 독박 육아를 한 셈이다.
갓 돌이 지난 막내, 초등학교 1학년 둘째, 6학년인 첫째까지 구석구석 손이 안 가는 게 없었다. 스트레스로 임신 중 생긴 기미는 생활이 팍팍 하니 부위만 더 넓어졌다.
세 아이는 세트처럼 함께 움직였다.
한 명이 장염이면 모두 장염에 걸렸고, 한 명이 감기에 들리면 모두 감기에 걸렸고, 한 명이 수족 구에 걸리면 그것까지 단체로 걸렸다.
세명을 혼자 케어해야 하니 2인실 병실을 쓰며 아예 보따리를 싸 갖고 가서 며칠씩 다녀와야 했다.
일주일에 두 번은 대학원에 출석해야 했고, 리포트까지 제출해야 하니 퇴근 후 애들 재워놓고 리포트를 쓸 때는 삶이 너무 팍팍했다.
전등 불빛에 자주 깨어 우는 막내 때문에, 아이 머리맡에 검정우산으로 빛을 가리고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친정부모님은 부모님 대로 육아로 스트레스를 받았고, 시어머니는 남편의 재활로 하루 세끼 꼬박 식사를 챙기고 빨래까지 신경 써야 한다며 짜증을 내던 때였다.
남편은 마누라가 간병을 했냐, 밥을 해줬냐, 빨래를 제대로 해줬느냐며 한 마디씩 불만을 토해 내 염장을 지르곤 했다.
일이 벅차니 아내로도 엄마로도 딸로도 며느리로도 학생으로도 어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생활의 연속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둘째는 태권도 학원에서 발차기를 하다 엄지발가락이 꺾이면서 발톱이 살 속으로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발톱을 제거하고 깁스를 한 채 꼼짝 못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생긴다는 말이 꼭 맞았다.
온종일 천장만 쳐다보니 먹는 것에 진심이어서 맨날 먹을 것 타령이고, 가만히 누워 먹고 자니 몸은 나날이 불어났다.
내 일생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였다.
모두가 잠든 밤이면 주방창문으로 보이는 가로등 불빛을 보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였는지 고민하느라 잠 못 이루는 밤의 연속이었다.
안 좋은 일은 이사와 관계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남편이 원망스럽기만 했고, 점 점 남편의 고향인 그곳이 싫어졌다.
그때 나를 버틸 수 있게 해 준건, 힘든 만큼 불어나는 통장의 비자금이었다.
남편은 집을 비우는 만큼 쓰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생활비를 줬고, 아이들에게 미안했는지 따로 챙겨주곤 했다.
대학원은 등록금 외에 소소하게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남편은 융통성 있게 알아서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