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기선 잡기에서 난 졌다.

by 블랙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지난 생활이 주마등처럼 훑고 지나갔다.


결혼을 앞두고 선배들은 귀가 따갑게 조언을 해줬다.

남편은 결혼 초장에 꽉 잡아야지 그렇지 않음 평생 피곤하게 산다고.

그렇다.

나도 그 기선을 잡으려고 가장 많이 싸웠던 것이 결혼 초였고 그 싸움에서 졌다.

그 결과는 결혼생활 내내 살얼음 같은 길을 걸었다.

첫 싸움은 결혼 두 달도 안 돼서였다.


한 지붕 안에 사업장이 있으니 출퇴근도 없고 시간이 남아도는 남편에 비해, 출. 퇴근이 정확한 공무원인 내가 생활을 맞추기는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하루쯤, 한 시간쯤 늦게 간다고 하늘이 무너지냐며 1분 1초 단위로 움직이는 조직생활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서류나 장부와 씨름하는 곳이라면 미뤘다 할 수도 있지만,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미 완성체인 아이들과 함께 하는 곳이라 매 순간이 생동감 있는 치열한 삶의 현장 그대로였다.

점심을 먹을 때도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정신이 없었고, 화장실에 갈 때도 종 종 걸음으로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숨 가쁜 생활이었다.


그에 비해 팔자 좋은 남편의 하루 일과는 정오쯤 일어나, 동네 사랑방인 다방에 가서 모닝커피나 계란 동동 띄운 쌍화차를 마시고 노닥거리다,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고...... 집에 와서는 일 하는 아저씨들과 또 커피를 마시고...... 아마 하루 열 잔 이상은 보약처럼 커피를 마시며 지냈다.






그날은 퇴근 후 저녁준비를 하는데 전화를 받고 다급히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곧 돌아오겠지 했지만 저녁을 다 차리고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 대문 밖을 서성이다 보니, 택시를 타고 나가는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누구냐고 묻자 당당하게 다방아가씨인데 일을 마치고 떠나면서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해서 잠시 갔었고 짐이 많은 걸 보고 택시를 대절해 줬다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 집은 다방 커피를 자주 시키는 VIP였지만, 그 부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없었다.


한바탕 속사포처럼 쏘아붙이고는 자전거 페달을 밟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 가냐고 뒤에서 소리쳤지만, 같이 있으면 대판 싸울 것 같아 차라리 자리를 피한 것이다.

막 어둠이 내리던 때라 시골 도로를 지나다니는 자동차도 드물었고, 가로등조차 없는 도로를 달린다는 것은 위험했다.

날이 어두워져 더 나가지 못하고 되돌아왔지만 집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동네 지인의 집에 가서 마음을 가라앉히려 들렸더니, 마침 남편이 당직이라 오지 않으니 자고 가라고 했다.

하지만 쉽게 잠을 들지 못하다가 새벽녘에 살짝 잠이 들었나? 지인의 남편이 아침을 먹으러 오는 바람에 더 있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아저씨들이 출입하는 쪽문을 통해 도둑고양이처럼 숙직 방으로 기어들어갔다. 아저씨들은 일찍 일을 시작하니 방은 빈방이었고,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 홀아비냄새가 폴폴 나는 이부자리를 덮고는 밤새 설친 잠을 자느라 코까지 골았나 보다.


점심때 방에 쉬러 온 아저씨가 발견하고 큰 소리로 남편을 부르는 바람에 꼼짝없이 붙잡히게 되었다.

결혼 후 첫 외박이라 엄청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남편은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하며 웃고 있었다.

남편아 화를 내야지~그래야 나도 화를 낼 거 아냐~


아! 난 큰 결심을 하고 첫 외박을 했는데 결말은 싱거웠고, 남편은 맛난 음식을 사 주며 다음엔 그러지 말라며 가출한 딸 달래듯 구슬렸다.

싸움 같지 않은 첫 부부싸움이었다.


비록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남편은 진짜 화를 내야 할 때는 화를 안 내고, 사소한 일에는 목숨 걸고 달려들어 가끔씩 당황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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