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27세 클럽 11화

THE 27 CLUB.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

by 블랙홀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바실라초프는 소련의 음악가이자 시인으로, 소련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계 및 러시아 락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주요 장르는 바르드 락 및 포크 락이며 27세에 사망했으며, 27세 클럽 중 한 명이다.

1960년 볼고그라드주에 위치한 체레포베츠시에서 태어났다.


1977년 체레포베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체레포베츠 야금소에서 아버지와 함께 화가로 일하다 1978년 스베들 로프스크에 위치한 우랄 대학교에 입학해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1983년 졸업한 뒤 1년 동안 커뮤니스트 지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1980년대 초반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하였다.

국가의 규제를 받지 않는 인디 음악가 및 밴드는 레닌그라드 락 클럽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공식 공연 혹은 방송 출연이 힘들었기에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빅토르 초이 등의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은 주로 이런 식의 라이브를 통해 공연하고 청중과 교류하였다.


1984년 9월 체레포베츠에서 그는 소련 및 러시아의 저널리스트이자 음악 비평가인 아르테미 트로이츠키를 만났고, 그의 소개를 통해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몇 차례 크바르티르니크를 개최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https://youtu.be/TfKqZ0IRmOY?t=7 (탁 트인 벌판에 라는 곡)

유툽 에서 펌( https://www.youtube.com/@grufields1577)

1985년 3월 바실라초프는 데데테의 보컬 유리 셰프추크와 함께 첫 무대 데뷔를 하였으며, 이후 자신의 첫 공식 앨범인 '세 번째 수도'를 녹음하였다.


1986년 그는 레닌그라드에 정착하였으며 3월부터 레닌그라드 락 클럽의 책임자였던 세르게이 피르소프의 도움으로 캄차트카 화력발전소에서 화부로 일할 수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예술가는 생계 때문에 석탄 화부로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1987년 봄 그는 알렉산드르 우치텔 감독의 영화 '락' 촬영에 참여하였으나 도중에 촬영을 중단하고 그 해 6월 그는 제5회 레닌그라드 록 페스티벌에 참가해 상을 받았다.


1988년 1월 29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같은 해 2월 17일 아침 7시에서 9시 사이 자신의 집 부엌 창문으로 떨어져 사망한다.

2월 23일 그는 코발레프스키 공동묘지에 묻혔다.

소련의 영화감독 라파일 라흘린의 딸 아나스타샤 라흘리나(1965 - 2018)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면서 1985년 아들 이반이 태어났으나 어릴 적 사망했다.

바실라초프의 사망 이후인 1988년 8월 3일 라흘리나는 아들 예고르를 낳았다.


바실라초프의 정확한 사망 원인은 현재도 불명이지만, 고독 및 슬럼프에 시달리던 그가 투신자살을 했다는 게 대표적인 견해이다.

그와 사실혼 관계이던 아나스타샤 라흘리나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영적 감각 비슷한 게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어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교류에 한계가 있었고, 일종의 카산드라 콤플렉스와 심한 외로움에 시달렸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1986년 중반부터 창작의 고통에 시달렸고 실제로 그의 마지막 곡인 '체리'는 1987년 중반에 쓰인 곡이다.


죽기 1-2년 전부터 그의 신곡 발표나 공연 횟수는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에고르 레토프 또한 1987년 바실라초프를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그는 너무나도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는 완전하게 부서지고 파괴된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기력은 남김없이 소진되어 있었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바실라초프는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불라트 오쿠자바 등과 함께 러시아의 바르드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평가받는다.


러시아 음유 시가에 영향을 받아 시 낭송에 가까운 포크 음악을 했으며, 러시아에서는 상당히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지만, 가사가 현지인들이 해석하기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해외에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고, 그에 대한 자료도 별로 없어 아쉬웠다.




















keyword
이전 10화THE 27 CLUB. 재니스 조플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