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27세 클럽 13화

THE 27 CLUB. 커트 코베인

by 블랙홀

미국의 전재적인 기타리스트이자 너바나의 멤버였다.


당시는 메탈이라는 장르 자체가 몰락하며 록이 주 쟝르가 될 정도로 대중 음악사에 끼친 영향력은 지대하다.


1990년대를 상징하는 '최후의 락스타'라고 평가받으며, 명실상부 1990년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X세대의 아이콘이다.

27세에 사망했으며 사인은 권총에 의한 것이지만 사망 3일 후 발견돼서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1. 커트 코베인의 출생


1967년 2월, 미국 워싱턴 주 에버딘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은 자동차 정비공이고 어머니는 웨이트리스였다.

코베인의 전기를 집필한 작가는 커트의 생가를 취재한 뒤 음악인 중 가장 작고 낡은 집으로 표현할 만큼 초라했다.


커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 웬디는 19살, 아버지 돈 코베인은 21살에 불과했고 3년 뒤에 여동생인 킴벌리가 태어났다.

커트의 이모에 따르면 커트는 2살 때부터 노래를 부르고 4살 땐 피아노를 연주하며 작곡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님은 커트가 9살 되던 해에 잦은 마찰과 다툼으로 인해 불화가 커져 이혼했고, 부모님의 이혼 후 커트는 아버지를 증오하며 그 영향으로 죽을 때까지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2. 커트 코베인의 우울증


커트의 우울증은 선천적인 영향과 후천적인 영향 둘 다에 기인했으며, 그 이유는 그의 양가에 두루 정신병과 우울증이 존재하였다고 한다.


친척들 중 몇 명은 자살을 기도했거나 혹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2명이 자살하였고, 그의 외증조부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자해로 병원에서 죽었단다.

다른 두 명의 삼촌은 권총자살을 할 만큼 깊은 집안 내력이 전해져 나온다. 따라서 커트에게 자살과 우울증은 그리 먼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트와 함께 밴드를 꾸려온 멤버들과 올림피아 그리고 시애틀의 록 씬 대부분의 펑크 로커들은 커트처럼 가난했고 이혼으로 얼룩진 인생을 헤쳐 나왔다.

같은 밴드에 있던 크리스 노보셀릭도 부모의 이혼으로 얼룩진 과거를 가지고 있다.

불우한 가정환경은 그 바닥에서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커트의 사진집 겸 기록물인 'Cobain unseen'에서는, 커트가 어렸을 때 동네 친구의 형이 산속에서 목을 매 자살한 시체를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였다고 한다.

경찰들이 현장에 올 때까지 몇 십분 동안이나 그 기괴한 현장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선천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커트의 성격, 불우한 가정환경, 이러한 충격적 장면을 본 기억의 잔재 등이 그의 곡이나 특히 가사에 많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3. 커트의 성장 환경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와 살았는데 어머니의 재혼과 바람기로 인해 매일 싸웠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재혼한 어머니의 양부와도 사이가 나빴고, 양부가 어머니와 커트에게 가정폭력을 일삼아 가출하기도 했단다. 가출한 동안에는 친척과 친구 집을 떠 돌아 살기고 하고 노숙생활도 했다고 한다.


이런 환경은 학교에서는 급우들에게 폭력을 일삼는 문제아였으며, 대마초를 피웠기 때문에 주변인에게 배척받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청소년 시절부터 그는 대마초, 술, 담배 등에 빠져서 심각한 중독 수준에 이르렀고, 예술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가 차차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처음 배운 악기는 드럼이었다고 한다.

커트는 본인의 성장 이야기를 말할 때 사실과 허구를 섞어서 모호하게 표현하곤 했으며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 중에는 사실이 아닌 것들도 있다고 한다.


(커트의 공연 - 다음 펌. 우왕 넘 넘 잘 생겼당)



4. 너바나 결성


커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가족을 떠나 여자친구와 동거하게 되었다.

그는 생계를 잇기 위하여 청소부 같은 잡일을 하고 지내다가 펑크 록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커트는 일을 그만두고 일렉트릭 기타에 빠져들었고 훗날 얼터너티브 록밴드 Melvins로 음악사에 족적을 남기는 다른 멤버들과 fecal matter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한다.

이때 녹음한 Illiteracy Will Prevail라는 이름의 데모 테이프는 지금도 유튜브 등에서 풀버전을 찾아볼 수 있다.


1987년, 마침내 커트 코베인은 자신을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해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인 베이시스트 크리스 노보셀릭과 함께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에서 밴드 너바나를 결성했고, 2년 후인 1989년 데뷔 앨범 Bleach를 발매한다.


인디 시절, 커트 코베인은 동료 뮤지션들 사이에서 최소 하루 9시간 이상은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는 정열적인 음악인으로 유명했다.

또한 당시 커트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공연 중에는 금주, 금연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금연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커트는 만성적인 위염과 복통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 외에도 그는 선천적이라 할 수 있는 조울증과, 기관지염 그리고 척추측만증 등 병에 시달리게 된다.

게다가 그는 주변의 평가에 심하게 휘둘렸기 때문에 데뷔 싱글 Love Buzz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헤로인을 하기 시작했단다.


1989년 발매한 너바나의 1집 앨범이 차트에도 오르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너바나는 많은 라이브 공연들과 미국 투어들에 힘입어 언더 씬에서 확고한 팬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1990년에는 첫 앨범 Bleach의 드러머였던 채드 채닝을 해고하고 데이브 그롤을 새로운 드러머로 영입했다. 이때부터 멤버들과의 불화는 끊이지 않았다.


요즘 잘 나가는 '나 솔'에서 16기 상철의 친구가 운영하는 모텔, 226호는 커트 코베인이 단골로 묵던 숙소로 지금도 커트 코베인의 방으로 유명하단다.



5. 커트의 성공을 위한 노력


커트와 크리스는 실력에 비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미국 전역 및 전 세계에 음반 배급망을 갖춘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기를 원했다.

많은 유명한 메이저 레코드 레이블들이 너바나와 계약하기 위한 물밑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커트 코베인이 존경하고 교류가 많았던 소닉 유스의 서스턴 무어의 권유로 당시 소닉 유스도 속해 있었던 게펜 레코드의 산하 레코드인 DGC(David Geffen Company)와 1991년 초에 계약을 맺어 프로듀서 부치 빅과 메이저 데뷔 앨범을 작업하기 시작했고 명성을 얻어 성공하고 싶어 했다.


이후 1991년 9월 발매된 음반이 빌보드 200에 144위로 입성하며 좋은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엄청난 인기로 Nevermind는 거침없이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까지 밀어내며 빌보드 1위를 달성하였다.


그렇게 너바나와 커트 코베인은 세대의 아이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커트는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관과 상충되는 상업적인 사운드로 프로듀스 되었기 때문에 앨범이 성공한 것이라며 Nevermind 앨범의 인기에 회의감을 느꼈다.

또한 자신을 시대의 대변자로 떠받들 여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에 우울해하며 점점 음악에 흥미를 잃어갔다.


공연 중에 드럼 셋 등에 몸을 던지거나 기타를 박살 내는 퍼포먼스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가 쓴 기타 대부분은 온전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라이브 중 박살 내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이 퍼포먼스는 Bleach 시절 드러머와의 불화 때문에 시작되었다.


(다음에서 펌)



6. 언론과의 불화 및 마약


앨범이 성공하자 언론에서는 커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곡들의 가사와 속뜻을 트집 잡는가 하면, 커트가 동성애 인권 옹호주의자라는 것과 그의 중학교 시절 친한 친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엮어서 커트를 동성애자로 몰아가기도 했다.


커트가 파티에서 웃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찍은 파파라치의 사진을 싣고는 "무명 시절에는 "엘비스 프레슬리는 예술적인 재능이 없는 장사꾼이다"라면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까던 사람이 성공하니 엘비스처럼 행동한다."며 그를 이중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커트는 자신과 밴드가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고 결국 마약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부모님의 이혼과 불화, 양부의 가정폭력으로 인해 심한 애정결핍을 가지고 있었던 커트 코베인은 온전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싶어 했고, 때마침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코트니 러브와 1992년 결혼했지만 언론의 공격이 더 심해지게 된다.


결국, 최고의 인기를 얻으며 Nevermind 투어를 진행하던 도중, 커트는 심한 복통으로 쓰러져 입원하였고, 몇 달 동안 치료를 받으며 잠적한다.

그리고 딸이 태어나고 얼마 후 컴백했지만, 언론에서는 커트 코베인이 마약으로 인해 건강이 매우 안 좋아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커트는 이런 언론들을 조롱하기 위해 괴상한 가발을 쓰고 병원 가운을 입고 휠체어를 탄 채 무대 위에 나타나서 부들부들 떨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뒤로 쓰러지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그리고 공연 중에 루머로 인해 고생하는 커트는 관객들에게 "Coutney, We love you'''라고 외쳐주기를 부탁한다.


커트 코베인은 결국 마약 중독으로 인하여 자신의 의지로 자살했다. 어쩌면 언론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기억해 다오. 점 점 희미해져 가는 것보다 일 순간 타올라버리는 삶이 더 괜 찮다는 것을. 평화, 사랑, 공감 - 커트의 유서내용 중 일부 발췌


( https://blog.naver.com/oldfnew 에서 펌)

에서 펌)커기억해 다오.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보다 일 순간 타올라 버리는 삶이 더 괜찮다는 것을. 평화, 사랑, 동감. 커트 코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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