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때, 내 살던 집에서 위로 50여 m를 올라가면 읍내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이장님 댁이 나온다.
대를 이어 오는 부농으로 사람들은 그 집땅을 안 밟고 지나는 이는 없을 거라며 지주님으로 섬기는 이들도 있었다. 하긴 이장님 댁 논을 소작으로 부치며 사는 사람들이 열이면 서ㆍ너 사람은 되었다.
슬레이트지붕시절 돌 담위엔 뱀처럼 굽이 굽이 검은 기와가 꼬리를 물고 돌아가고, 30여 칸이나 된다는 ㅁ자형 대저택 안은 함부로 들여다보고 들어갈 수 없도록 육중한 빗장 대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타지에서 살다 초등 6학년 때 할머니 댁과 합가 하며 할머니 집으로 들어가 살 때였으니 마을 일은 잘 몰랐다.
그 집 쥔장이라는 이장님은 본적도 마주친 적도 없지만 형제들은 국회의원님, 읍장님, 방앗간 사장님 등 내노라하는 사람들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와 부를 지녔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행랑채에는 집사부부가 살았고, 집사는 울 반 친구의 아버지였다.
위 마을 이모댁을 가려면 그 집 앞을 지나갔는데 그때마다 담 장너머로 보이는 능소화나무와 후박나무는 정겹기만 했다. 혹여 안이 보일까, 고개가 돌아갈 때까지 보고 또 봤지만 보이지 않는 담장 안은 항상 궁금했다.
가끔씩 '저 집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궁금해서 친구에게 물어봤지만 친구도 안 채엔 들어간 적이 없어 잘 모른단다.
다만 서울에서 대학에 다닌다는 그 집 도련님이 방학이 되어 집에 올 때는 친구에게 학용품을 선물로 주곤 한다며 자랑하듯 보여줬다.
시골에서 태어난 대부분 여자애들은 국민학교, 잘해야 중학교를 졸업하면 도시 가발공장, 방직공장으로 취직해서 떠나던 때라 대학생이라는 그 집 도련님은 어떤 사람일까??? 혹여 지나가다 마주치지는 않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그 집 앞을 지나가곤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이장님이 돌아가셨다고 마을이 떠들썩했는데, 이상한 얘기가 돌기시작했다.
재산문제로 형제들이 대판 싸워 돌아가셨다느니, 뇌졸중으로 쓰러져 한쪽을 못 써서 그랬다느니,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이상한 여자를 데리고 와 한바탕 큰 소리가 났다느니... 어른들이 수군대는 얘기를 어렴풋이 들었지만 친구는 벙어리가 된 양 입을 꼭 다물고 있으니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대학생 아들이 올 때마다 긴 생머리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예쁜 처녀가 나타나면 그 집에서 큰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처녀가 지날 때마다 동네어른 들은 혀를 끌끌 차며 어디서 저런 여시 같은 여자를 데리고 오냐, 꼬락서니 보니 이장님 댁도 망조가 들었다느니 수군대곤 했었단다. 세련되고 예쁜 처녀를 첨 봤을 때는 난 영화배우인 줄 알았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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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님이 돌아가셔서야 굳게 닫혔던 대문이 활짝 열어졌고 전 부치는 냄새는 연기를 따라 남실거리며 피어올랐다.
넓은 마당엔 하얀 차양이 담장보다 더 높이 쳐졌고, 상여가 나가던 날은 만장이 앞을 서더니 요령소리에 맞춰 커다란 상여가 나왔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산 자락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란 만장은 꼬리를 물고 돌아갔고, 요령잡이의 구슬픈 선창에 상여꾼의 후창가락은 가사와 곡조가 너무 슬퍼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찍 났다.
"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허 딸랑~~ 오실 날이나 알려주오~~ 어허 딸랑~~ 북망산천 떠나갈 때~어허 딸랑"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들은 들리는 말은 대들보에 목을 매 자살한 거란다.
돈 많은 부자인 데다 논도 많고 이장님으로 존경받던 분이 왜 그랬을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그 집엔 그 예쁜색씨와 결혼한 대학생 아들이 고향을 지킨다며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