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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 글쟁이 Oct 17. 2020

나이가 들수록 새벽녘 전화 벨소리가 무섭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중년이 될수록 상실감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부모님의 사망을 겪게 되는 때이기도 해서'라는 말을 얼핏 들었다.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말이 기억에 오래도록 남고

며칠이 지난 지금도 그 말이 생각이 난다.


나 역시 그 상실감을 겪었기 때문이다.


9년 전 여느 때와 같은 저녁이었다.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친정아버지 한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지? 저녁은 먹었고?"

"응, 이제 먹으려고 해~ 아빠는 먹었어?"

(부끄럽지만 나이 40이 다 되어가던 그때도 나에겐 '아빠'였고 50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나에겐 여전히 '아빠'일 것이다.)

"조금 있다 먹으려고..

그런데  ㅇㅇ아 혹시 내가 죽으면"

"아 또 그 소리야? 술 마셨어?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나 바빠 끊어"


그 당시 아빠는 술만 마시면

'만약에 내가 죽으면'이란 말을 자주 하셨다.

처음엔 아빠가 나이가 들면서 기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우울함에 그런 말씀을 하신듯해서 가족 모두가 그런 말씀

마시라고 괜찮다고 하는데

계속 같은 말씀을 하니 순간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버렸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 통화가 되어버렸다.


다음날 오전, 당시 7살이었던 아들이 문화센터에서 수업을 들을 때였다.

집을 나서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렇게 나는 아빠의 사망 소식을

현관문을 나서다 듣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진다'

'눈앞이 깜깜하다'

'두 다리에 힘이 빠진다'

이런 말들이 어떤 것인지 한꺼번에 알아버렸다. 눈물이 났다.

아니 대성통곡을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사실이 아닐 거라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나의 모습을

봤던 7살짜리 아들은 엄마가 저러다

죽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단다. 외할아버지의 죽음도 슬펐지만 엄마의 모습이 더 눈물이 났다 라고

지금은 중3이 된 아들이 며칠 전에

나에게 말했다.


장례식장에 가서 아빠의 영정사진을 봤을 때에도 꿈이었으면 했다.

시간이 하루 전으로 돌아갔으면 싶었다.

입관할 때 아빠의 얼굴을 보고 그 이후에 기억이 없다. 쓰러졌다고 했다.

그렇게 난 아빠와 마지막 인사도 못했다.

세월이 흘러 9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가슴이 아린다.


그리고 그날 이후 5년 후에

난 또 남동생과 영원한 이별을 했다.

그해에 자꾸만 가족여행을 가고 싶었다.

아빠도 안 계시고 가족끼리

여행다운 걸 해본 적이 없어서

더 그랬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일정을 정하고 삼 일 후에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당뇨로 투석을 받고 있던 남동생과

엄마와 나와 아들..

당시 여동생과 남편은 갑자기 정한

여행이라 휴가를 내지 못해 가지 못했다.

그걸 아직도 후회하고 아쉬워한다.

동생은 조카를 워낙 좋아해서

조카와 여행을 간 것만으로도 좋아했다.

우리 아들도 외삼촌을 잘 따랐다.

그렇게 여행을 끝내고 우린 대구 가는 비행기를 엄마와 동생은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헤어졌다.

여행 다음날 서울에 눈이 왔었나 보다

남동생이 화단에 눈이 쌓인 사진을 찍어 보내면서 문자를 보냈다.


'누나, 서울에 눈이 왔어 시훈이가

태어나고 우리 집에 왔을 때도

이렇게 눈이 많이 왔었는데

벌써 열한 살이 되었네 이번 여행 참 재미있었어 누나 돈 많이 썼지?

계좌번호 보내봐 내가 조금 보탤게'

'됐어 그딴 거 신경 쓰지 말고

니 건강이나 신경 써'


아픈 동생이 돈을 보낸다고 해서

속상한 마음에 이렇게 문자를 보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틀 후 동생은 하늘나라로 갔다. 아직도 엄마는 말한다.

예전 사진들을 보면 제주도 갔을 때만큼 남동생이 그렇게 잘 웃는 사진은 없다고..

그때 진짜 남동생이 좋아했었다고..

집에 와서도 여행 얘기밖에 안 하더라고..

나한테 고맙다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아졌다. 전에는 필요 없던 장례식용 옷도 계절마다 구비해놓았다.

올해만 친구들 부모님 부의 소식이 세 번이 있었다. 난 경조사 중에서 조사는 꼭 챙기려 한다. 지역이 멀더라도 기차를 타고서라도 잠깐이라도 갔다 온다.

아빠의 장례식 때 연락을 받고 찾아온

친구가 나를 보자마자 껴안아주었을 때 한참이나 그 친구 품에서 울었던 기억 때문이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많이 위안이 됐기 때문이다.


가족을 잃은 아픔을 어떻게 위로를 해줄 수 있겠냐만은 그래도 당신 혼자 슬퍼하지 않도록 나도 지금 당신과 슬픔을 같이 하고 싶어서 여기 있는 거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이별을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떠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누가 되었든 가족은 전화로 지인들이라면 문자로 소식이 온다.

전화든 문자든 슬프지 않은 소식은 없지만

그래도 난 전화로 오는 소식이 더 슬프고 아프다.

그래서 늦은 밤 새벽녘 전화벨 소리는  무섭고도 싫다.



"그러니까 엄마! 늦은 밤 트로트 듣는다고 핸드폰 만지다가 딸내미 번호 잘못 누르지 말란 말이야!!! 자꾸 그러면 2G 폰으로 바꿔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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