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명상: 41분 음악 명상 (Chopin Piano Concerto in E minor, Op.11 – by Cho Seong-Jin, 2015 Final Stage of the Chopin Competition)
오늘은 호흡 명상 말고 음악 명상을 했다. 앉아서 들숨 날숨 챙김을 하거나 십여 년 전쯤 명상 집중 수행을 하러 갔을 때 천천히 걸으며 했던 명상 이외에 처음 해보는 종류의 명상이다. 협주곡은 한 편의 대작 영화와 같다. 그 안에 기승전결, 섬세하고 부드러운 구간과 강렬한 클라이맥스를 두루 갖추고 있어 대충 배경으로 흘러 들을 수 없는 특징을 지녔기에 오히려 음악 명상에 적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선을 할 때 코끝 호흡에 의식을 두는 것처럼 이번에는 눈을 감고 귀에 들리는 소리에 의식을 두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으므로 일단 해본다.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듣는 편이지만 클래식의 매력은 그중에서도 특별하게 느껴진다. 작곡가의 의도가 ‘점점 빠르게’ 또는 ‘노래하듯이’라는 식으로 악보에 적혀 있지만 그 해석은 수학처럼 답이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연주자에 따라 같은 곡도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즉 건반을 누르는 타이밍이나 누르고 유지하는 시간, 한음 한음을 분명히 끊어서 누를지 아니면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누를지, 마지막 음을 깔끔하게 끝낼지 아니면 약간 여운을 남길지에 따라 같은 곡이라도 연주 시간이 달라지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좋아하는 작품이라 무수히 들었지만 이렇게 눈을 감고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연주가 시작되었고 곧 음악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몸과 마음 전체가 소리를 담고 파동을 일으켰다.
1악장에서 바다의 철썩이는 파도, 그 가운데 거대한 배의 힘찬 항해가 보였다. 13분 10초 즈음부터 천천히 고조되다가 14분쯤에 피아노 소리로 들리는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두 번 반복되는 연주는 마치 깊은 바닷속 고래의 노래와 같다. 이건 아주 오래전에 이 곡을 처음 들은 순간 느꼈던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심상이라 그런지 이번에도 역시 그렇게 들렸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이 협주곡은 모든 음악 중에서 내가 실제로 꼭 가서 들어보고 싶은 작품이 되었는데, 희한하게도 이 순간에는 그런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다. ‘다음에 직접 가서 듣고 싶다’는 열망을 일으키는 대신 그냥 ‘지금 들리는 이 음악’에만 집중한 덕분이다.
2악장, 느릿느릿 평화롭게 이어지는 구간이라 잠시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까 전에 본 어느 예능 프로그램 광고가 불쑥 생각난 것이다. 곧 아차-하고 다시 지금 듣고 있는 소리로 복귀했다.
3악장, 피아노에 귀를 기울이자 건반을 위아래로 길게 오르내릴 때나 장난스럽게 메아리를 남기는 이어지는 음들을 칠 때 아주 자잘한 작은 음까지, 마치 사람으로 치면 목소리에 기계음이라도 넣은 듯이 여러 개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맑고 청명하게 들림을 알아차렸다. 소홀하거나 뭉개지는 부분이 없었다.
담담하고 깨끗하며 무엇보다도 ‘건강한’ 피아노 연주였다. 쫓기는 듯 급한 느낌, 또는 집착하며 너무 매달리거나, 힘이 빠지거나 힘이 과도하게 발산된 듯한 느낌이 없었다. 피아노 연주에 중도가 있다면 이 연주에서 그 길을 찾은 것 같았다.
마침내 연주가 끝나고 '브라보!' 소리와 함께 뜨거운 박수갈채가 들리는 순간 눈을 떴을 때, 피아니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휘자와 포옹을 하고 제1 바이올린 연주자와 악수를 하고 청중을 향해 인사를 하며 팔과 손이 덜렁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예전에 이미 몇 번 봤던 대회 영상이었는데도 이 부분은 처음 알아차렸다. 귀로만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롭고 깔끔했던 연주는 실은 모든 것을 쏟아부은 치열한 시간이었다. 조성진 피아니스트를 비롯해서 무대에 선 이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느껴졌다.
기존에 콘서트홀에 가서 보고 들은 클래식 공연들 혹은 눈으로 보면서 들었던 공연 영상들과 이렇게 눈을 감고 명상을 하려는 마음을 일으켜서 들은 경험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실제 공연을 보거나 생생한 연주 영상을 보았을 때는 종종 몰입을 과도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예로 몇 년 전 피아노 공연장에서의 일이 하나 기억난다. 그날 콘서트 프로그램 중에서 굉장히 어둡고 무거운, 그러면서도 몰아치는 듯한 느낌의 곡이 연주되자 심장이 울렁거리고 속이 답답하면서 2층에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느낌, 또는 좌석이 갑자기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그 곡이 이어지는 내내 마치 롤러코스터라도 타는 듯이 난간을 꽉 움켜쥐었다. 이어서 평화롭고 밝은 느낌의 다른 곡이 연주되었을 때 비로소 긴장감이 해소되었다. 또 다른 공연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곡을 들으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과 연주의 탁월함 이외에도 그 곡에 담긴 나의 추억 같은 다른 요소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에 비해 오늘의 경험은 중도에 이른 피아노 연주처럼 감정이나 감각에 깊게 이끌려가지 않고 차분하고 명료하게 음악을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만약 심박수를 측정했다면 흥분도가 이전의 경우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괜찮은 음악 명상이자 치유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