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1194일째
꿈에 친할머니가 나오셨다. 언제부턴가 겨울마다 아빠는 먼 고향에 내려가 혼자 계신 할머니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종종 톡으로 시골 풍경이나 할머니 사진을 보내주신다. 결혼 전에는 명절 때 자주 뵈었지만 이제는 나도 따로 갈 곳이 있다 보니 시골에 내려가지 못한 지 꽤 되었다.
꿈속은 따스한 봄날 또는 이른 여름, 나는 동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할머니 댁 마당을 걷고 있었다. 방 안에 앉아 열린 문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계신 할머니께 내가 말했다. "할머니, 이번에 김치 너무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할머니가 수줍은 미소로 인사를 받으셨다. 이때 나는 조금 놀랐는데, 왜냐하면 아빠가 보낸 최근 사진들과는 달리 내가 어릴 때 뵈었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어리둥절했지만 어쩐지 안심이 된다고 느낄 무렵, 잠에서 깨었다. 마침 알람이 울리기 5분 전이었다. '그래, 오늘 전화를 드리자.' 눈 뜨자마자 그렇게 다짐했다.
할머니는 이제 기력이 부족하신 관계로(95세가 넘으셨다) 몇 년 전부터는 아빠와 고모들이 김장을 하시는데, 레시피는 아마 그대로인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김치를 참 좋아했지만 지금은 김치 냉장고도 없고 수업 스케줄 때문에 집에서 밥을 차려 먹는 날이 별로 없다 보니 받은 김치를 제대로 다 먹는 게 쉽지 않았다. 가장 맛있게 익은 때를 놓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 맛의 진가를 잘 몰랐었다.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처리해야 할 과제처럼 느껴졌던 게 할머니의 김치였다.
그러다가 올해 비로소 김장 김치를 우선순위에 두고, 적극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먹을 때마다 알맞게 익은 무와 배추와 적당한 속에 감탄하며 할머니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지- 생각만 하다가 아직도 인사를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오늘 저녁 수업 전에, 꿈이 아닌 현실에서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김치가 참 맛있다고, 덕분에 잘 먹고 있다고, 배추도 직접 농사지으신 거라면서요- 등등 감사를 전했다. 통화를 마치기 전에 할머니가 다급하게 부르셨다. "경리야-"
"네, 할머니."
"김치 모자라면 할머니 집에 더 있다. 더 가져다 먹어라."
순간 아주 어린 시절, 여름 방학 때 시골에 놀러 온 나와 동생을 위해 생전 해보신 적 없는 떡볶이를 만들어 주시던 할머니의 손이 떠올랐다. 농사일에 그을린 거칠고 굵은 손등이. 읍내 슈퍼에 나가 아이스크림을 사다주시던 기억도 함께. 그때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그랬듯 할머니는 남자 손주들을 어여삐 여기셨고, 이런저런 그럴만한 이유들이 쌓여 나는 늘 외할머니와 좀 더 가까웠다. 얼마 전에 사랑하는 외할머니를 떠나보내고, 이제 나에게 하나 남은 할머니... 할머니가 김치를 더 가져가라고 다급히 내 이름을 부를 때, 잊고 있던 고마운 기억들이 밀물처럼 쏟아졌다. 왠지 눈가가 시큰거렸다. 여전히 친할머니는 내게 어려운 사람이다. 하지만 조금은 할머니를 생각하며 엷은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